[김상규 논설주간] 국민 모두가 교육평론가라고 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교육에 관한 논의는 늘 뜨겁다. 교육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 개인이나 그룹이 전문적 견지에서 교육을 언급하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든 필요한 일이다. 그들의 논의와 쟁점은 교육정책의 결정에 영향력을 가진 정치계나 이익단체가 취사선택할 수 있는 정보원이 되므로 풍부하고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환경이야말로 교육제도, 교육내용, 교육방법 등을 시대에 맞게 기름지게 하는 토대가 된다.
5,000만 명의 교육평론가 사회
자녀를 가진 국민에게 있어 교육은 생활 그 자체나 마찬가지이므로 큰 관심과 함께 생활수준에서 활발한 교육담론이 이뤄진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교육에 이해관계가 있는 국민들은 객관적이고 몰인격적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이며 ‘생존권’적인 관점에서 교육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교육 등 사회제도에 대해 적지 않은 국민들은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사교육을 줄이는 정책을 담당하는 공직자가 자기 자녀는 일류의 사교육을 받고 있는 경우나 저출산 대책을 입안하는 담당 공무원이 자기는 결혼도 하지 않고 결혼할 의사도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의 논의가 활발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두 가지만 지적하면 하나는 국민 스스로가 보통교육을 이수한 피교육자로서 실제 학교에서 일어나는 교육문제를 직접 경험했으므로 교육을 대체적으로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즉 국민 누구나 교육평론가가 될 기초적인 자격을 갖춘 셈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국민 대부분이 자녀 또는 주변에 학교교육을 받고 있는 피교육자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교육이 피교육자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활동이므로 개인이나 가정생활에서 교육은 중요한 부분이 돼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회에서의 논의가 교육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거나 교육에 관한 엄밀한 사고에 근거한 체계적 논리가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또 자녀들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발달하는 것을 절실하게 바라는 국민의 생생한 의견으로부터 유리돼 있는 경우도 많다. 전문가들조차도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면 바르게 정의할 수 없거나 수십년 전 대학에서 배운 교육의 정의를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고, 객관적 사실보다는 자기의 주관과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토대로 교육의 성격이나 가치를 정의하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시중에 교육과 관련된 서적은 양적으로 풍부한데도 내용을 보면 교육의 본질 및 가치를 찾으려는 흔적과 노력을 잘 찾기 어려운 것도 이러한 현상과 무연은 아닐 것이다.
21세기의 코페르니쿠스적 자세
지금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교육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이해관계는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반성적 자세이다. 반성적 태도는 ‘교육에 대한 나의 관점에 문제가 없는지’를 돌아보고 교육에 대한 이해관계에서 나를 잠시 떨어져 있게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회의 바르지 못한 사실이 만들어낸 고정관념에 대한 반성적 태도는 인류 역사에서도 적지 않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과학이 탄생하기 이전 ‘천동설’은 사회의 오랜 고정관념이었다. ‘천동설’이란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있고 그 주위를 모든 천체가 회전한다는 논리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류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1609년에 갈릴레오는 수제 천체망원경으로 우주를 보고 네 개의 위성 이 목성 주위를 회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지구도 어떤 궤도를 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갈릴레오 이전에도 이러한 의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우리가 극적인 대반전이나 개혁이 있을 때에 종종 ‘코페르니쿠스 적 발상의 전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코페르니쿠스다. 그는 16세기에 천체 연구를 하는 도중에 지구의 주변을 달과 태양이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회전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천동설을 기각하고 지동설을 주장했다. 당시의 지식이나 사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대역전의 논리였다. 당시 그리스도교 중심 사회에서 천동설을 부정하는 것은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이자 목숨과도 바꿔야 하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저작을 생전에 발표하지 않고 사후에 발표하도록 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찬동했던 이탈리아 철학자 부르노는 투옥돼 화형에 처해졌다. 갈릴레오도 그리스도교의 교의에 반한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에 붙여져 지동설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지동설을 주장한 과학자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는 종교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사실에 맞게 재정립하고자 한 도전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가톨릭교의 사제였으며 갈릴레오 역시 가톨릭교의 충성스런 신도였다. 그들의 내면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신이 창조한 아름다운 세계가 일정한 법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신념을 확인하고자 했던 참된 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교육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할 정도로 수많은 교육담론이 유행하고 있으며 교육을 지배하기 위한 이념도 더 뚜렷이 나타나고 이념과 논리 사이에 단층선 역시 더 두꺼워지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는 종교적 충성심이 강했지만 과학의 관점에서 사실관계와 다르게 알려져 있는 사회의 고정관념을 바꾸려고 역사적인 도전을 했다. 정치인, 교육전문가, 교육자, 교육계의 리더들이 교육을 생각 하는 마음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교육의 본질과 현재의 교육문제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문제를 추적해 처방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의 반성적 태도야말로 교육을 사회변화의 속도에 일치하도록 하는 데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은 교육을 자기화하는 무책임한 전문가가 아니라 미래 우리 사회의 존재가치를 창조해갈 ‘21세기의 코페르니쿠스’, ‘21세기 갈릴레오’이다.
‘교육 받는다’는?
교육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용어도 없을 것이다. 정치, 경제라는 말을 들으면 위화감이 생기기도 하지만 교육에는 평등, 공평이라는 용어가 더 친숙하며 그래서인지 위화감도 크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정치적·경제적 활동의 차이가 교육의 결과이면서도 개개인에게 만족을 주는 참여기회가 매우 한정돼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교육은 누구나 인생의 전반기에 일정기간 동안 동질적 환경에서 피교육자라는 동일한 경험을 가질 기회가 부여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교육의 성격은 늘 고정적이지 않고 시대나 지역(국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교육의 성격은 ‘아이들의 성장을 위한 의도적인 작용’ 내지는 ‘인간의 성장과 발달에 관련되는 사회적 행위, 활동 및 상태’를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성장과 발달’, ‘사회적 행위, 활동’ 등의 개념은 단순하지 않고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성장을 위한 의도적인 작용이라는 문화성을 공유하면서도 각각의 시대와 사회에 의해서 사회성의 차이가 존재했다. 여기서 사회성이란 ‘타인과의 관계 등 사회생활을 중시하는 성격’이자 ‘사회생활을 영위할 소질, 능력’을 말한다. 그러므로 교육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아동의 성장에 대한 작용이며 문화성과 사회성을 포괄’ 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교육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인격형성’의 작용인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영위·작용’인 사회적 측면이 그것이다. 인격형성으로서 교육에는 교육하는 자(교육자)와 교육받는 자(피 교육자)가 있으며 교육자는 피교육자가 바람직하게 ‘성장과 발달’(형성)하도록 작용한다. 어떠한 성장과 발달이 바람직할지는 시대와 사회, 개인에 의해 다르고 교육자 개인의 인간관, 아동관, 교육관, 가치관, 환경, 태도 등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인간의 성장에는 학교 교육만이 아니며 수많은 기회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대학입시준비에 매달렸던 고등학생이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면 학생들은 명시적 또는 암묵적 구속에서 해방된다.
새로운 친구도 사귀고 폭넓은 교우관계도 만들어진다. 동아리활동, 서클활동 등도 참가하고 학교 밖의 많은 것들을 큰 제약 없이 체험할 수 있다. 고등학교까지는 그럴 시간도 없었고 학교규칙과 사회의 시선에 묶여 할 수 없었던 머리 염색도 하고 유니폼 대신에 자신의 선호에 맞는 다양한 옷도 입어볼 수 있다. 대학에 들 어와서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친구의 화장과 스타일을 자연스럽게 따라 하게 되고 많은 동료들과 교류 속에서 그간 몰랐던 정보나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취미와 에티켓, 친구가 태어난 지방의 문화와 습관을 알고, 친구의 잘못된 행동으로부터 바른 행동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즉 학교나 교원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인간 형성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교육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의도적 인간형성과는 다른 의식적·의도적인 행위가 있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운명 지워졌다.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란 생활을 공동으로 영위하기 위한 ‘마이크로 코스모스’이다. 인간형성의 과제는 어떻게 하면 공동체를 담당한 일원을 만들어낼까, 즉 공동체의 질서와 가치를 받아들일 인간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에 있었다. 이처럼 인류의 오랜 역사에 걸쳐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위한 교육’과 ‘형성’이 융합한 ‘인간형성’이 인류의 오랜 역사에 걸쳐 그 중핵을 이루고 있었다.
학교가 지니는 사회·문화적 가치
그런데 근대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시민사회, 근대국가라는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났다. 새로운 공동체는 근대 이전의 사회가 요구했던 ‘공동체의 유지’ 보다는 개인으로서 가치를 중요시하는 특징이 있다. 물론 새로운 공동체에서도 ‘공동체를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전의 사회와 공통성은 있지만 그 이전과는 다른 방법의 인간형성이 요청됐다는 점이다. 루소는 교육에서 개인의 가치를 발견한 선구자이다. 그는 ‘최초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에밀』에서 자기 자신을 투영시킨 가정교사를 통해 가공의 소년 에밀이 성인에 이루기까지 성장하는 과정을 그렸다. 루소는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에 아이를 아이로만 보는 당시 사회에서 근대 이전의 사상을 거부하고 아동 개개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반성적인 교육학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그는 ‘교육의 코페르니쿠스’였다.
교육의 사회적 측면은 교육을 사회의 존속을 위해 이전 세대 가 다음 세대에 미치는 작용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 에 의하면 교육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인간을 다른 동물로 부터 구분하는 것’이며 ‘다양한 행위를 다수의 인간과 협력’해 이루며 ‘지식, 기능, 가치, 생활방법 등 문화를 한 세대에 한정하지 않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이다. 그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육이란 사회생활에서 아직 성숙하지 않은 세대를 대상으로 성인세대에 의해 행사되는 작용이다. 교육의 목적은 아동에 대 해 전체로서의 정치사회, 또는 아동이 특히 예정돼 있는 특수한 환경이 요구하는 육체적·지적, 도덕적 상태를 아이의 내면에서 발현시켜 발달시키는 것이다.”
뒤르켐에게 있어 ‘개인은 사회를 필요로 하고 사회도 개인을 필요’로 하며, 교육은 ‘사회 존재의 본질적 존립요건을 아이 들의 마음속에 이식하는 수단’으로서 중요함을 가진다. 스스로 유전을 하지 못하는 문화가 교육에 의해 인류역사에서 전달해 축적돼 왔다.
문화의 전달은 사회에서 또는 사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즉 집단의 사상, 습관, 가치체계를 젊은 세대에 전달하는 방법적 사회화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인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입장에서 사회화로서 교육을 생각한다면 단순히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서의 작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며 받아들이는 것도 사람에 따라 다르고 형성되는 개인도 각각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즉 사회의 일원으로서 개인은 스스로 배움을 추구하고 자기를 형성하는 존재이다.
이 과정을 문화화라고 부르며 인간이 사회적이고 문화적 존재로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과정이 개성이다. 그러므로 학교 이외의 다양한 공간에서 의 사회화와 문화화의 과정에 의해 인간의 개성은 형성될 수 있다. 현대와 같이 디지털 미디어가 국민의 일상생활, 선거 등 정치활동, 사회활동 등에서 권력화 돼가는 사회에서는 더 그렇다. 이러한 것을 교육이라고 보는 경우 학교라는 사회 제도가 교육의 성립에 있어 반드시 불가결의 조건이 아니라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일수록 전통적으로 학교교육에 기대했던 가치와 ‘교육의 기회균등’이라는 공교육의 이념은 더 중요시 돼야한다.
사회변화의 속도에 일치하는 교육은?
‘교육 = 학교교육’이라는 관점에 서면 교육은 학교에 관계하는 현상에 한정된다. 사회의 권력이 학교교육에 의해 만들어졌던 20세기에서는 '교육 = 학교교육'이라는 전제가 우리 사회에서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회변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21세기에서는 학교의 권위와 교육내용에 대해 좀 더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요사이 텔레비전이나 휴대폰을 켜면 쏟아져 나오는 광고의 홍수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20세기 중반만 해도 광고나 상업행위에 노출되는 대상은 주로 성인이었으나 지금은 가정에 텔레비전이 있고 휴대폰을 가진 아이라면 연령에 상관없이 광고에 노출되는 세상이 됐다. 약품광고, 보험광고, 관광 상품 광고, 생활용품 광고, 주식투자, 금융상품 등 수많은 광고에 24시간 과잉 노출돼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터넷에 실시간으로 탑재되고 있는 엔터테인먼트에 관한 정보는 광고 이상으로 청소년들의 가치관과 태도,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멀티미디어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광고나 기사를 피하는 방법은 없는 시대가 돼 있다. 즉, 우리 사회가 미디어에 의한 쾌락지향주의 사회로 이행 돼가고 있고 국민들은 태어나서 일생을 보내는 기간에 미디어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현명 하게 보험 상품을 선택하고 가입하는 방법, 낭비 없이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방법, 계약서를 잘 보는 방법, 주식에 투자해 손해를 보지 않는 방법, 좋은 대출상품을 고르는 방법, 여행 을 잘하는 방법, 인터넷 쇼핑몰에서 충동적 구매를 하지 않는 방법 등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
사회생활에서 단체 활동에 유익하며 보람을 창조할 수 있는 악기 다루는 스킬, 스포츠 기술 등도 학교교육에 들어있지 않다. 이러한 스킬은 학교 밖에서 과외 수업을 받든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 스스로 터득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손해를 통해 학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가가 마련한 교육과정에 이런 것들과 관련된 추상 적인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지만 자립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들어있지 않다.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는 국어, 영어, 수 학, 사회, 과학 등의 교과는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필수과목 이다. 고등학교 3학년에 치르는 수학능력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이러한 과목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대학을 갈 학생들은 그렇다고 치지만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올 학생들에게 있어 사회를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상식은 과연 무엇일까?
한 가지만 더 지적하면 학교교육의 권위에 관한 것이다. 미국, 영국 등 서구 선진국에서는 학교에 취학하지 않고 가정에서 특별한 교육철학이나 종교적 방법으로 학습을 하는 홈스쿨링이 제도화돼 있다. 미국의 홈스쿨링 인구는 200만 명에 육박하고 있으며, 영국도 수만 명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과 프랑스에도 홈스쿨링에 의해 학습을 하는 아이나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 최근에는 학교교육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학부모들의 학교 회피현상으로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나 는 추세다. 반면 우리나라는 학교를 졸업하지 않으면 직업, 결혼, 사회활동에서 충분한 기회를 얻기가 불가능한 사회구조이다.
법규범뿐만 아니라 사회규범, 일반상식이 학교의 권위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의 권위와 교육의 자유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만들어져 있다. 공교육제도가 가장 먼저 발달한 선진국의 교육에 대한 패러다임 변화를 냉철하게 직시할 경우 우리나라가 지금은 학교의 권위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때로는 과잉보호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지금처럼 학교가 권위를 가질 수 있으며 제도가 학교의 권위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장담은 하기 어렵다. 학교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근대사회에서 학교가 ‘사회의 소우주’로서 인정받았던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교육에 관여하는 자들이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20세기라는 구식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의 거대한 물결을 거침없이 거슬러 나아가려는 태도야말로 시대의 변화 속도에 일치하는 교육이 되는 첫걸음이자 ‘21세기 교육의 코페르니쿠스’일 것이다.
MeCONOMY magazine November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