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이코노미 김선재 기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일제에 대한 항거와 저항,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강력한 의지로 1945년 8월15일 치욕적인 일제 치하 식민지에서 광복이라는 기쁨을 맞이한 지 올해로 73년이 됐다. 광복된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은 일제 식민지 잔재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친일파 청산 등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다. 인권이 심각하게 유린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1991년 8월14일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고백한 후 27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일본은 사죄는커녕 역사를 부정하고 할머니들을 모욕하는 언사를 서슴지 않고 있다.
올해 8월 15일은 대한민국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간의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은 지 73년째 되는 날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과연 우리에게 제대로 된 광복인가 되묻게 된다. 실질적인 광복을 이뤘다고 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이 겪었던 피해 중 대표적인 것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다. 꽃다운 나이에 일본의 침략 전쟁에 끌려다니면서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던 그 어린 소녀들은 어느덧 할머니들이 돼 전범 일본에 수십 년째 사죄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할 일본은 오히려 “돈을 벌기 위해 위안부를 자처했다”,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팔아놓고 지금 와서 피해자인 척 한다” 등의 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더욱이 지난 2015년 12월28일 박근혜 정부가 일본정부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적·불가역적 종결을 약속한 ‘한·일 위안부 합의’를 체결했다. 일본정부가 10억엔을 출연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이 재단을 설립해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한다는 것이 골자다.
그러나 일본과의 합의 체결 전 위안부 피해 할머니 및 관련 단체와의 협의가 전혀 없었고, 합의문에서 일본 측의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는 부분도 법적 책임이 아닌 도의적 책임을 인정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합의 무효 등 거대한 반발을 불러왔다. 여기에 ‘이면 합의 논란’까지 더해지자 외교부는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TF’를 구성해 조사에 들어갔고, ‘소녀상 이전 문제’와 ‘관련 단체 설득’, ‘제3국 기림비 문제’, ‘성노예 용어 사용’ 등에 관해 이면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관련해서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한·일 위안부 합의’에 문제가 있다며 재협상을 약속했지만, 올해 1월 동북아 및 일본과의 외교 관계 등에 대한 고려와 ‘한·일 위안부 합의’가 양국 간 공식적인 약속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며 재협상 하지 않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다만, 일본에 대한 공식 사과 요구는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결국 ‘한·일 위안부 합의’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공식 사죄 및 법적 배상을 위해 노력했던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정부가 물거품으로 만들어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했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서 정부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지난 1991년 8월 14일 故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를 최초로 고백한 것도 민간의 노력을 통한 것이었고, 이용수 할머니가 2007년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증언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민간의 노력에 따른 것이었다. 6월 말에 개봉한 ‘허스토리’도 일본의 사죄와 법적 배상을 받기 위한 피해자 개개인의 노력을 다뤘다. 이들은 일본 본토에서 열린 위안부 피해에 대한 공식 사죄 및 배상 청구 소송에서 자신들의 피해를 당당히 드러내며 싸운 끝에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일부 인정하는 판결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관부(關釜)재판을 아시나요?
영화 ‘허스토리’는 1992년 12월25일부터 1998년 4월27일까지 부산 지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박두리, 하순녀, 이순덕 등 3명)와 근로정신대 피해자(박소득, 유찬이, 이영선, 강용주, 정수련, 박순복, 양금덕 등 7명) 총 10명이 일본 야마구치(山口市)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下關) 지부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자신들의 피해에 대한 공식 사과 및 1억엔의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6년 동안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재판은 소위 ‘관부(關釜)재판’이라고 불리는데, ‘관부(關釜)’는 한국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재판의 원고단은 6년간 총 23차례 열린 재판을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진행했다. 관부재판의 정식 명칭은 ‘부산 종군위안부·여성근로정신대 공식 사죄 등 청구소송’이다. 1991년 8월14일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최초로 증언한 이후 같은 해 10월19일 부산여성경제인연합회는 ‘정신대 신고 전화’를 개설했고, 12월까지 총 8명이 이를 통해 자신의 피해를 알렸다. 이 중 4명(박두리, 하순녀, 박소득, 유찬이)이 1차로 원고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1993년 12월13일 5명(이순덕, 이영선, 강용주, 정수련, 박순복), 1994년 3월14일 1명(양금덕)이 원고단에 이름을 올렸다.
원고단을 이끌었던 김문숙 한국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회장은 당시 부산에서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일본 고객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자 일본 고객들은 등을 돌렸고, 사업은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회장은 재판을 멈추지 않았고, 20억원 정도 되던 전 재산을 모두 쏟아부었다. 이후 김 회장은 관부재판 기록물 등을 전시해 둔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부산에 설립, 지금까지 운영하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일본 정부 책임 일부 인정한 최초·유일 판결
이 재판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큰 의미를 갖고 있다. 1심 재판 결과이기는 하지만, 위안부 피해에 대한 일본정부의 책임을 일부 인정했기 때문이다. 판결 전후로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최초이자 유일한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재판부는 일본 헌법이 침략 전쟁 피해자에 대한 전후(戰後)보상을 위한 입법·제정 의무를 국회에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련법이 만들어지지 않아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원고단의 ‘입법부작위에 의한 국가배상책임’ 주장을 인용했다. ‘입법부작위’란 입법 의무가 있음에도 입법을 하지 않거나 불완전하게 입법한 것을 말한다. 결국 일본 정부와 국회가 입법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법을 하지 않아 원고의 기본권이 침해됐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재판부가 이같은 판결을 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93년 8월4일 발표된 고노 요헤이 당시 내각관방장관의 담화(이하 고노 담화)가 있었다. 고노 담화는 “장기간에, 또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돼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것이 인정됐다”며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고,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고 밝혔다. 이어 “전장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는 일본을 제외하면 조선반도(한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당시 조선반도는 일본의 통치 하에 있어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다”면서 “결국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 하에서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준 문제”라고 인정했다.
재판부는 “피고(일본 정부)는 종군위안부 제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텐데도 헌법 제정 후 수년간 작위의무(피해자 구제의무)를 다하지 않고 원고들을 방치해 고통을 배가시켰다”며 위안부에 대한 성적 강제는 여성차별, 민족차별이고, 피해를 방치하는 것 또한 헌정질서에서 허용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고노 담화 발표시기부터 입법이 이뤄졌어야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존재해야 할 법률이 존재하지 않아서 위법’이라는 논리는 의원내각제인 일본에서 행정부는 물론, 입법부인 의회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게다가 우리나라 대법원 격인 일본 최고재판소는 ‘입법부작위’에 대해 ‘쉽게 상상하지 못한 정도로 예외적인 사정이 있어야’ 위법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어, 당시 재판부의 판결은 ‘사법 쿠데타’라고 불리기도했다.
위안부 피해자에 각각 30만엔…2·3심에서 뒤집혀 패소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일부 인정하기는 했지만, 1심 판결 역시 한국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재판부는 입법부작위에 대한 손해배상금으로 원고에게 각각 30만엔, 즉 300만원씩을 지급하라고 했고, 그것도 위안부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정했다. 또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나마도 2심과 3심 재판에서 뒤집혔다. 일본 정부의 항소로 이뤄진 2심 재판에서 히로시마 고등재판소는 “위안부, 정신대원에 대한 사죄·보상 입법 의무 존재가 명확하다고 할 수 없고, 헌법 전문과 구조가 과거의 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 개인에 대한 사죄·손해배상 등의 구체적 의무를 국가에 부여했다고 해석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최고재판소는 할머니들의 항소를 기각, 패소가 확정됐다.
설상가상 ‘한·일 위안부 합의’…정부는 뭐하나?
故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위안부 피해 증언을 통해 이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피해 할머니들은 세상의 편견 속에서 숨어 살아야 했다. ‘허스토리’에서는 이런 당시의 편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김 할머니의 증언에 대한 뉴스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자, 그것을 듣고 있던 택시 기사는 신경질적으로 라디오를 끄며 “몸판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할머니들이 쪽팔린 줄 알아야지!”라고 말한다. 당시는 광복된 지 46년이나 흘렀던 시점.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일본 정부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 부정과 한국 정부의 외면 속에서 할머니들은 보호받지 못했고, 사람들이 관심 밖에서 힘겹게 살아지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27년이나 흘렀지만, 정부는 무능력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이렇다 할 협상이나 해결의 실마리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민간 차원의 노력도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했다. 오히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체결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일본으로부터의 경제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일제 식민통치 피해자들의 인권문제를 돈으로 무마시켰던 한·일 기본조약. 이 때문에 일제 식민통치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등 민간 차원의 끈질긴 노력은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와 법적 배상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유엔인권기구 및 국제법 전문기구들의 결론을 도출해냈다.
그럼에도 기존의 입장을 굳히지 않고 뻣뻣하게 버티던 일본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2015년 ‘못된 거래’는 30여 년간의 문제 해결을 위한 피해자들과 세계 시민들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 문제를 10억엔이라는 돈으로 해결하겠다는 ‘못된 거래’였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가슴에 또 한 번 대못을 받는 ‘나쁜 거래’였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일본 정부는 ‘이 문제의 최종적 및 불가역적인 해결을 확인한다’는 합의문 문구를 근거로 위안부 문제는 종결됐다는 전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하며 합의 이행을 요구하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위안부 합의에서 1mm도 못 움직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작년에는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던 시도도 유네스코에 대한 일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실패했다. 2016년 5월 한국과 일본, 타이완, 중국 등 8개국 14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위안부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 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는 유네스코에 2,744건의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등재를 신청했지만, 지난해 10월31일 유네스코는 “당사자 간 대화를 위해 등재를 연기한다”며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네스코에 가장 많은 분담금을 내는 일본이 2016년 10월 유네스코 분담금 납부를 연기하는 등 외교적 압박을 가한 탓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외교부와 여성가족부는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해 역사적 진실에 반하는 어떠한 언행에도 반대한다”며 “앞으로도 위안부 기록물이 객관적이고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도록 가능한 노력을 지속해 나갈 것”이라는 입장만 내놨을 뿐이다.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는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운동은 피해자와 민간단체들의 노력으로 이뤄져 왔다. 정부는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인권회복 문제를 ‘국익’ 또는 ‘관계국과의 관계(외교)’ 문제에 걸림돌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본다”면서 “‘투트랙 외교’를 주장하면서 실상은 ‘원트랙 외교’를 한국 정부 스스로 해오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일본 정부의 경우 정책부터 시행 등 외무성이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국 정부와 관계를 끊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 불편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역사문제와 자국민의 인권문제는 여전히 부수적인 문제로 취급하고 있다”며 “가해국과 피해국이 거꾸로 돼 있다. 피해국이 가해국 눈치를 보는 외교, 피해자들과 국민들이 볼 때는 너무 불편부당한 외교”라고 꼬집었다.
윤 대표는 “‘화해·치유재단’ 해산 등을 시작으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한·일 위안부 합의’ 문제 해결을 피해자와 국민에 맡기지 말고, 정부가 저지른 것이니 정부가 해결하면 좋겠다”면서 “한 사람의 생존자라도 더 살아계실 때 일본 정부가 사죄하고 배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피해자들이 겪은 역사가 잊혀지지 않도록 미래 세대에게 교육하고 기억하도록 해 다시는 우리 딸, 아들에게 이런 아픔이 재발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3년 만에 10억엔 대체 예비비 편성…‘화해·치유재단’ 해산은 언제?
‘한·일 위안부 합의’ 재협상을 약속했던 문재인 정부는 올해 1월 “동북아 및 일본과의 외교 관계 등에 대한 고려와 ‘한·일 위안부 합의’가 양국 간 공식적인 약속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면서 재협상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식 발표했다. 그러면서 ‘한·일 위안부 합의’로 만들어진 ‘화해·치유 재단’을 해산하고,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엔을 우리 정부의 예산으로 충당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의 10억엔과 ‘화해치유재단’이 설립된 지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10억엔을 대체하기 위한 103억원 규모의 예비비 지출안이 지난달 24일 국무회의를 통과했을 뿐이다. 1년 이상 사실상 기능을 잃어버린 ‘화해·치유재단’은 아직 사무실 임대료, 인건비 등으로 일본 정부의 10억엔을 계속 소진하고 있다.
윤 대표는 “생존자들은 고령과 병마로 시간과 싸우며 버티고 있는 중에도 인권회복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그것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었다’고 발표한 문재인 대통령과 한국 정부의 입장에 따른 후속 조치가 신속히 이뤄지기를 기대해왔다”면서 “올해만 벌써 5명의 생존자가 돌아가셨다. 한국 정부가 약속한 ‘화해·치유재단’ 거취 모색과 관련해 이미 의견을 수렴한 대로 후속 조치를 시행하고, 피해자와 국민들에게 약속한 대로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해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이 회복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약속이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매년 8월14일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로 지정
민간차원의 노력만으로 어쩌면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회복과 일본의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노력들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이 있은 이후 1992년부터 시작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집회(이하 정기수요집회)’는 올해 28년째를 맞았다. 7월11일 제1343차 집회에서 윤 대표는 “여전히 처벌받지 않고 있는 전쟁범죄 상징기들, 상징 노래들, 상징 언어들, 그리고 범죄의 잔인한 진상들. 이것이 바로 1945년 8월15일 전쟁이 끝났지만, 아직 우리는 전쟁이 끝났다고 하지 않는 이유다. 우리 할머니들이 ‘아직 우리는 해방을 기뻐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라며 “그러는 사이 콩고, 우간다, 나이지리아, 이라크 등 세계 각지의 무력분쟁지역에서 여성들, 어린이들, 힘없는 약자들은 우리 할머니들이 살았던 삶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여전히 그 속에서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국제기구가 매년 수차례 결의하고 권고하지만, 그저 문서로 쌓여만 가고 있다. 아무리 신문, 뉴스를 뒤져도 가해자들이 색출돼 처벌받았다는 얘기를 들을 수 없다”면서 “그것이 바로 김학순 할머니가 용기 있게 떨쳤던, 미투를 외쳤던 8월14일을 세계 일본군 위안부 메모리얼 데이로, 기림일로 선정하고 지키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정대협은 매년 8월14일을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로 정하고, 매년 이를 기리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2012년 12월8~10일까지 타이완 타이베이에서 열렸던 ‘제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행동을 기억하고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회복을 위해 8월14일을 기림일로 지정했다. 2013년 8월14일 ‘제1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진행, 올해 6차 기림일 행사를 준비 중이다. 지난해에는 국회에서도 이날을 기림일로 채택하기도 했다.
1일부터 서울과 수원, 천안, 광주, 부산, 제주에서 ‘진실과 정의, 그리고 기억’ 전시회가 열리고, 8일부터는 이들 지역을 순회하는 강연회가 개최된다. 14일 오후 7시에는 매주 수요집회가 열리는 주한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서 ‘촛불문화제-함께 평화’가, 15일 오후 12시에는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세계연대집회’가 계획돼있다. 특별히 올해 행사에는 세계 각지 전쟁과 내전 지역에서 성폭행 피해를 입은 생존자들이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다.
윤 대표는 “정대협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역사와 생존자들이 28년 동안 끈질기게 일본 정부를 향해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인권운동가로서 활동했던 것을 세계가 기억할 수 있도록 2012년 3월8일 ‘나비기금’을 조성,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해왔다”며 “6월19일은 UN이 정한 ‘세계전시 성폭력철폐의 날’이다. 정대협은 스위스 제네바 UN에서 세계 각지의 무력분쟁지역 성폭력 생존자들을 초대해 증언을 듣고, 연대했다. 그 과정에서 여성들이 올해 행사 때 서울을 방문해 연대하고 싶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해 줬다”고 말했다.
자국민 피해 회복 위해 노력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
철저하게 인권을 유린당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반드시 해결돼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많지 않다. 위안부 피해 생존 할머니들은 총 27명으로, 평균 나이는 91세다. 생존자들이 얼마 남지 않았을 뿐더러 모두 상당한 고령이다. 지난달 1일에는 김복득 할머니가 향년 10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웠던 상황이 ‘한·일 위안부 합의’로 인해 더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민간단체들은 그 누구보다 강한 의지로 일본 정부를 향해 “사죄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I can speak)’의 실제 주인공인 이용수 할머니는 제1343차 정기수요집회에서 “당당하게 일본과 싸우겠다. 내 나이가 91살인데, 활동하기 딱 좋은 나이다. 거꾸로 하면 19살”이라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대사관 앞에서 외치는 것은 무엇인가. 돈이 아니다. 사죄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아이 캔 스피크! ‘아이 캔 스피크’ 주인공이다. 말할 수 있다. 말하겠다. 끝끝내 말하고, 여러분들과 같이 해결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민간의 노력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가 간 문제로 정부의 역할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더욱이 피해국이 가해국에 책임을 묻고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수십 년이 흘렀다고 자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 의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무거운 책임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일본 정부에 사죄와 법적배상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MeCONOMY magazine August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