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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신문화를 찾아서(10) ...조선의 구빈 사상(하편)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위원>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는 로마의 쇠망 원인을 다룬 명저로 꼽힌다. 역사에서 우리가 얻는 가장 큰 교훈은 번영의 원인보다는 패망에 이르게 된 근본원인들을 아는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조선왕조의 멸망원인을 다방면에서 짚어보는 작업은 우리에게는 무척 소중하고 시급하기조차 하다. 그간의 저술은 조선왕조의 멸망원인을 주로 일본 등 외세의 침략과 쇄국 정책 등에서 찾았는데 지난해 조선의 정치사상과 경제 및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분석한 ‘조선왕조의 빈곤정책’이 나왔다. 박광준 일본붓교대학 교수가 쓴 ‘조선왕조의 빈곤정책’은 조선왕조는 왜 시장을 철저하게 억제하고 대외 무역을 차단하다시피 하여 가난한 나라가 되고 말았는지, 거의 모든 백성들이 나중에는 굶주리게 되고 왕조도 결국 구빈정책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이해하고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저자는 주장의 논거를 교조적 성리학 사상의 존재와 개인의 빈곤 책임을 인정하는 법가사상의 부재, 농민들에게 종자를 빌려주고 추수 후에 상환 받는 환곡제도와 창 제도의 실패 등에서 찾았다. 기자는 이 책을 읽고 책에 나오는 내용 중에 의문이 드는 점, 나아가 저술 내용에 없으나 조선왕조의 정신문화와 경제사회 의식에 대해 추가적인 질문을 덧붙여 이메일 인터뷰를 했다. 답변 내용은 조선왕조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상과 사람들의 의식을 진단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다. 지난 호 상편은 상당히 긴 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 외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 글을 읽어주셨다. 지난 호에 이어 하편을 싣는다.

 

Q. 조선의 사대부들은 주자성리학을 일종의 ‘덕치 지상주의’로 이데올로기화 한 것은 아닌가 생각되는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박광준 교수  주자학의 내용은 책을 통하여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서적은 조선에 많이 유입되어 있었고 사대부들은 그것을 독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자학은 어디까지나 중국적 풍토의 산물이므로 그러한 문화적 풍토자체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그것은 근본적인 한계로 그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중국문화는 크게 나눠 북방의 유목문화인 양(羊)문화와 남방의 농경문화인 패(貝)문화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문화가 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은 비록 북방지역이라고 하더라도 경제적 합리주의 경향이 조선에 비하여 강했다고 봐야 합니다. 조선은 유목문화 지역에 접하고 있었고 그 심장부에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압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성향을 띠었습니다. 거기에 주자학의 두 요소인 ‘이(理)의 세계’와 ‘기(氣)의 세계’, 혹은 ‘정신세계’와 ‘물질세계’ 중 전자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반쪽 주자학이라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인정(仁政)이나 덕치 등은 중국에서 발로한 용어이자 이념이지만, 같은 용어라도 조선에서는 교조적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시장과 교역, 화폐경제가 억압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고 생각됩니다. 끼니를 잇지 못하는 백성의 구제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마땅히 있어야 하나, 조정의 논의가 경제를 발전시켜 보다 넉넉한 사회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쭉정이 밤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밤은 알이 차면 밤송이를 깨고 밖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알이 차지 않은 쭉정이는 밤송이 껍질을 뚫고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껍질이 더욱 단단해져서 밤톨은 외부세계로 나올 수 없게 되고, 아울러 외부세계의 그 무엇도 그 밤송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되지요. 알이 차지 않아서 밖으로 나오지 못한 것이지만, 그 밤송이 안에서는 쭉정이 밤이 왕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사대부들의 상황은 여기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Q. 조선왕조의 구빈사상이 제도적으로는 중국에서 받아들인 것이지만 중국과는 내용이 상이하고 우리나라 고대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조선왕조의 구빈사상의 연원과 계승 관계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박광준 교수  백성을 보다 풍요롭게 살게 하는 방법, 그리고 기근이 들었을 때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주례(周禮)’의 황정12조에 종합적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주례란 조선이 모델국으로 삼았던 주나라의 제도개혁안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창(倉) 제도를 운영하는 것부터 기근 시에 증가하는 도적을 단속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12가지의 정책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구빈제도에 관한 고대동아시아 제도의 전형은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후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등에서 운영했던 창제도도 서적을 통하여 한반도에 소개되어 왔고 이미 고려시대에는 거의 모든 제도들이 시험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고구려의 진대법은 봄에 종자와 곡물을 농민에게 대여하고, 가을의 추수 후에 반환시키는 제도였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고국천왕16년(서기194년) 처음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것이 고려시대와 조선의 창 제도의 전형이라고 하지요. 조선에서는 창 제도를 환곡제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기간 제도로서 도입하여 대규모로 운영했습니다. 조선의 환곡제는 중국과는 다른 방법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같은 명칭의 제도라도 그 모습이 매우 달랐습니다. 우선, 창 제도가 발생한 사상적 배경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 창 제도는 법가적 동기에서 출발했습니다. ‘풍년 시 발생하는 곡물가격 폭락을 막기 위해 곡물가격을 조정하는’ 목적으로 창 제도를 만든 것입니다. 흉년이 계속되어 그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래서 중국 창 제도는 지주계급의 이익을 반영한 정책이었다고도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곡물가격을 조절할 수 있었다는 것은 ‘화폐경제’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환곡을 기근에 대비한다는 제도로, 즉 빈곤한 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덕치 이념실현의 수단으로 이해했고, 더구나 화폐경제가 거의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행하였던 것입니다. 원천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시도였습니다. 백성 한 사람이라도 아사자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적 태도는 실로 머리를 숙여지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아사자를 발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오히려 더 많은 아사자를 발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아사자의 발생을 두려워한 지방관들은 그들을 구제할 공적인 자원이 부족하면 으레 보다 유복한 백성들로부터 식량을 접수하여 빈곤구제에 사용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곡물을 저축하려는 유인이 없어져서 결국은 부유한 백성들이 더 더욱 줄어들게 하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Q. 조선왕조는 현대적 의미의 개념은 아닐지라도 ‘경제사상’과 경제를 살찌우는 정책 수단을 생각하고 실행한 적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군요.

 

박광준 교수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국가정책을 시행할 때 무엇보다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 실행능력입니다. 우리는 어떤 제도라도 도입하여 시행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제도를 만들어 낸 토착문화를 이해하지 않으면 새로운 제도를 정착시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도입된 지 오래지만 아직도 진정한 정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지적되는 것은, 우리가 그 이념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 이념을 실현시킬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토착문화를 민주주의에 맞도록 조정하는 능력과 기술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문화지체에 대비하여 ‘기술지체’라고 합니다. 중국의 창 제도는 화폐경제를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 제도인데, 화폐경제가 보급되지 못했던 조선에서 그 취지를 살리기는 본래부터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 이상적 제도를 조선에 맞게 시행할 기술력이 결핍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랬기 때문에 중국의 창 제도는 극빈층이 아니라 소위 ‘차상위 계층’을 위한 제도였으나, 조선에서는 극빈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백성을 기아로부터 보호하는 제도로 상정되었습니다.

 

조선왕조는 ‘국가는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굶주리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념에 불과한 것이고 현실사회에서 볼 때 나라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한 사람의 아사자도 발생시키지 않을 책임’이 지방관에게 짐 지워져 있었기에, 지방관은 보다 잘사는 백성의 재산을 접수해서라도 아사자의 발생을 방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여력마저도 없어진 것이 1840년경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시기부터 구빈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고 그 후 20년 지나면 전국적인 농민항쟁이 일어납니다.

 

조선사회는 공산주의적 농본사회였습니다. 조선의 통치이념을 한 글자로 표현하자면 ‘균(均)’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경제영역은 조선 초기에 철저한 국유화체제가 확립되었고 그것은 조선말기까지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정책기조는 무본억말(務本{抑}末. 본업인 농업에 힘쓰고 말업인 상업을 억제함)이었는데, 상업은 ‘간난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赤子入井)’ 위험한 행위로 간주하여 억제했고, 그런 무지한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 지배층의 역할이라고 여겼습니다. 개인의 동기와 인센티브를 인정하고 중시하면 사회가 위태로워진다는 생각이 조선주자학의 기본입장이었습니다. 덕치란 무지하고 가난한 백성을 골고루 먹여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농민이란, 국가가 그들의 활동에 불필요한 간섭을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삶을 개선해 갈 수 있는 주체적인 인간’이라고 하는 평범한 진리를 전혀 도외시했던 것입니다.

 

 

조선왕조의 이념적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은 ‘만사의 폐단 중에 사유재산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보다 150여년이 지난 시기, 이황은, ‘사(私)는 만악의 근본이다’라고 임금에게 진언하고 있습니다. 사(私)란 곧 개인의 경제적 유인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국영화의 실태는 다음의 『세종실록』(1437.2.5)의 기사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서울 남쪽에 기근이 심하여 굶주리는 사람들을 한강 건너 서울로 오게 하여 구제하자, 기민들이 노량진 근처 나루로 몰려들었습니다. 나라의 배(公船)로는 그들을 모두 건네주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작은 배를 가진 사람들이 배 삯을 받고 그들을 도강시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가 조정에서 논의된 후 세종은 다음과 같이 지시합니다. ‘의금부의 관리를 보내어 공선과 사선을 모두 모아 기민들을 실어 나르고, 사선이 배 삯을 받는 것을 엄금하라.’

 

배 삯 금지는 말하자면 나룻배사업의 국영화인데, 그것은 국가가 배의 임자나 사공을 임금으로 고용해서 운영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은 노비 혹은 신역자(16-60세)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노동자들이었습니다. 공산품 역시, 왕실 물품을 만드는 일부 장공인을 제외하고는 신역으로서 공산품 생산에 일정기간 종사하는 사람들이 생산했고, 그들은 임금노동이 아니었으므로 숙련노동자로 발전하기 어려웠습니다. 모든 농민을 농업공무원으로 편입한 중국의 인민공사(1958년) 체제보다도 더욱 철저한 국영화 체제였던 것입니다.

 

이 사례를 보면 조선왕조가 시장을 억제했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의 시장억제와는 본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벼룩시장마저도 억제하는 철저한 시장억제입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사가인 칼 폴라니는 철저한 재분배체제의 사례로서 소비에트를 든 적이 있습니다. 그는 검토대상에서 동아시아를 제외했었는데 만약 그가 조선의 환곡제도를 검토했다면, 역사상 가장 철저한 국영제도를 운영한 나라는 ‘조선’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시장은 극소화되었고 국민생활에 대한 영향을 크게 고려하지 않는 규범적 정책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좋은 사례가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 라는 그림입니다. 그것은 정조(正祖)가 1789년에 7박8일의 일정으로 수원화성에 갔다가 한강 배다리(舟橋)로 환궁하는 모습인데, 제가 관련 사료를 종합해 보니 다리 만들기에 동원된 배가 모두 290척, 수행 인원 등 총비용은 쌀10만석 정도였습니다. 이 시기는 조선에 흉년이 자주 들었는데 그 2년 전 기근의 경우, 구제대상자는 연인원으로 350여만명, 남도3도의 구제에 사용된 곡식이 모두 19만여석이었으므로 국왕의 행차비용이 얼마나 막대한 지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막대한 비용보다는 배다리로 인하여 한강(京江)의 물류(배 통행)가 오랫동안 멈추었다는 사실입니다. 배다리의 설치 및 철거 기간까지 장기간 배의 통행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당시에 경제부문에 어떤 영향과 불편을 끼치게 될 것인가라는 문제는 정책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비록 거의 모든 물류를 수로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장기간 물류를 막아도 될 만큼 물류의 양(경제규모)이 소규모였고 물자교역에 관련된 상인의 힘이 극히 미약했다고 하는 해석입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 두 가지 해석은 조선왕조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시사적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장시는 15세기 말 전라도 무안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조정에서 장시가 기근의 극복에는 매우 효과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만, 장시는 기본적으로 억제되었습니다. 나라가 백성을 먹여 살릴 여력이 없다면 최소한 백성들이 제각기 살길을 찾도록 그들의 활동을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삶이 그렇게 고통스럽고, 나라가 쇠퇴해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8세기 장시가 활성화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만, 그것을 오늘날의 시장활성화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전보다는 활성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상인이란 그 나름대로의 사회적 역할이 있으므로 무조건 억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이 중국을 경험한 북학파를 중심으로 제기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는 개화기의 충격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로서,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줄여야 한다는 법가적 사고를 정책적으로 실현하려는 노력 역시 개화기 이후에 보여지는 현상입니다.

 

Q. 조선왕조는 중국과의 공식적인 수백 회의 조공무역, 12회에 불과한 일본과의 통신사 무역 외에는 문호를 열지 않은 쇄국정책을 펼쳤는데, 쇄국의 원인은 무엇인지요.

 

 박광준 교수  쇄국정책은 조선의 선택이기도 했지만 강요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본적으로 조선주자학은 무역이나 상업의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고 그렇기에 억제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경제영역의 모순과 편견을 심화시켰습니다. 당시의 경제란 정치에 종속된 상태로서 하나의 독립된 제도로 보지 않기 때문에 ‘경제정책’이라는 용어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조선이 멸망한 것은 장기간에 걸친 국력(경제력)의 쇠퇴로 인한 것입니다. 조정은 백성에게 유인을 제공하여 생산성을 향상시키거나 새로운 산업을 진흥시키거나, 혹은 새로운 세수를 확보하기 위한 생산적인 활동을 계획적으로 추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으로부터 조선을 구한 명나라는 조선에 대하여 화폐를 사용할 것, 은광 등을 개발하여 재정을 튼튼히 할 것, 노비제를 없앨 것 등 많은 사회개혁안을 조언하였으나, 난을 극복한 후에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워낙 조선이 병약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명나라 실력자가 조선을 병합하여 군현으로 삼자고 황제에게 진언할 정도였습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은광을 개발하자는 신하의 제언에 대하여 선조는 ‘은 굴을 파헤치면 민심이 무너진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은 실사구시를 실천하는 지방관의 한 사람이었는데, 16세기말 포천현감과 아산현감을 역임하면서 민생을 살리기 위한 상소를 제출합니다. 그러나 극도로 피폐한 민생이 생생하게 그려진 그 절박한 건의사항을 조정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염전을 개발하여 소금을 생산하여 교역하면 민생이 나아진다고 주장하면서 소금생산을 허락해 달라는 그의 요청은 묵살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상당한 규모의 국제무역이 있었습니다. 송나라명주[지금의 영파(寧波)]에서 배가 떠나면 1주일에 예성강 입구까지 닿았다고 합니다. 무역은 주로 서해안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장시가 처음 무안지역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개국 후 400년 동안 무역선이 한 척도 조선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한탄의 목소리가 조선내부에서도 나옵니다. 경제쇠퇴의 원인이 국내 교역과 국제무역이 멈춘 것에 있다는 목소리였습니다.

 

조선 초기에 조정은 왜구의 피해를 줄이고 죄인들의 도망을 방지한다는 등의 이유로 공도(空島)정책, 즉 섬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제주도를 제외한 작은 섬의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킨 것입니다. 울릉도 독도도 그렇게 몇 세기 동안 비게 되었습니다. 해변가의 주민들도 육지 쪽으로 이주시킨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도정책은 1882년까지 계속되었지요. 극단적인 쇄국정책입니다. 다른 한편 쇄국은 강요에 의한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병자호란으로 청에 완전히 굴종한 후, 청은 조선에게 11개 조항의 항복약조(정축화약)를 강요했는데, 거기에는 일본과의 무역을 제외한 국제무역활동의 금지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8세기말 박제가는 조선이 백 년 이상 전쟁이 없었고, 백성들이 사치를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쇠퇴하고 왜 물자가 궁핍해가기만 하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는 경제쇠퇴의 원인을 무역이 멈춘 것에서 찾고, 조선조정이 중국 남부지방과의 무역을 허가하도록 청나라에 요청하면, 청나라가 들어줄 것 아닌가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정이니 조선시대 내내 국제무역이란 중국과의 조공무역과 대마도를 중개로 한 일본과의 부분적인 무역이 국제무역의 전부였습니다. 그나마 조공무역은 비단이나 사치품의 수입이 대부분이어서 만성적인 적자였습니다.

 

Q. 조선왕조의 멸망원인으로 서얼차별 또한 적지 않았다고 봅니다. 천민, 노예, 여성에 대한 차별은 다른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조선왕조처럼 서얼차별을 심하게 하는 경우가 세계사적으로도 거의 없는 것 아닌지요. 양반들이 거의 첩을 두지 않았나요, 그만큼 서얼의 숫자가 인구 비중에서 많이 차지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되는데요, 서얼 출신 인재만이라도 차별 받지 않고 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박광준 교수  서얼 차별이라는 문제는 신분제에서 파생된 문제이지만, 신분제 문제 중에서는 비교적 지엽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양반층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조선이 ‘노예제적 사회’였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조선은 극단적인 신분사회였습니다. 신분을 양반, 상민, 천민(노비)로 구분할 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양반과 노비비율이 높아지고 그만큼 상민의 비율이 줄었습니다.

 

18세기경 양반비율은 30% 내외, 노비인구가 약 30%였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양반은 일하지 않는 계층이요, 노비는 대부분 양반의 삶을 지탱하는 계층이니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40%의 인구가 양민인 셈입니다. 그 중에서 나라에 역을 바칠 수 있는 연령층의 남자는 더욱 소수가 되는데, 그들이 나라의 재정을 지탱하는 것입니다. 국가에 대한 조세 및 신역(身役)의 주된 부담은 양반과 노비를 제외하고 인구 40%를 차지하는 상민에게 집중되었다는 사실, 백성의 40%만이 일하는 사회, 그것이야말로 장기간에 걸친 조선경제침체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될 것을 우려하여 태종은 노비인지 아닌지는 그 부친의 신분에 따른다는 ‘종부법’을 시행했는데, 세종은 선왕의 결정을 뒤집고 그것을 폐지함으로써 노비수가 크게 증가한 것입니다. 뒤돌아보면 그 순간이 조선을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한 안타깝기 그지없는 결정이었습니다. 조선사회를 신분제사회라고 한다면, 반상차별(내지 양반 특권)이라는 측면보다는 노비제 문제에 보다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노비는 구(口)단위로 불리는 물건이었고, 세습되었으며 매매와 상속의 대상이었습니다. 노비제는 동아시아에서도 조선 특유의 악폐였습니다

 

 

중국은 송나라 이후 이미 신분제가 붕괴되었고 극히 일부의 노비가 존재했으나, 그들은 범죄인이었고 신분이 세습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이 노비제 사회 혹은 노예제사회(Slavery Society)였다는 주장은 팔레와 같은 외국 연구자가 제기하였는데, 역사학계나 경제사학계에서도 노비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조선이 노예제사회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노예제적 사회’였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신역 노동이나 노비 노동에서 창조적 노동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노비의 광범위한 존재는 ‘계약에 의해 노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퍼뜨렸고, 인권 무시를 예사로 생각하는 풍토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갑질’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이러한 역사 문화적 풍토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한국사회와 북한에서 나타났던 여성인권의식의 결여는 여자노비의 신역이라는 역사문화적 유산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대부에 의한 성의 착취는 거의 일상사였습니다. 저는 여성노비의 신역은 일찍이 그 어떤 나라에서도 없었던 극도의 반인륜적 제도였음을 우리가 인정하고, 그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하지 않고 먹고 사는 양반이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는 사회가 지속되었다는 것은, 조선사회에 ‘근면’에 대한 가치가 없었다는 뜻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다고 양반 살림이 모두 넉넉했던 것은 아닙니다. 양반의 대부분도 쪼들리는 살림살이였습니다. 그들의 빈곤이유 중 중요한 것이 자식들의 과거시험 뒷바라지였다고 합니다.

 

1800년을 전후하여 선산지역에 살았던 노상추라는 무관이 평생 쓴 68년간의 일기가 출간되어 있습니다. 그 일기를 보면, 과거시험 준비에 얼마나 많은 자금이 들어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과거준비를 위하여 활쏘기 등의 지도를 받기 위한 행차에도 반드시 노비를 딸려서 보내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정월에 무과시험이 있다고 해서 서울에 갔는데, 시험은 빨라야 3월 이후에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여러 차례 낙방합니다. 그리고 드디어는 합격합니다만, 발령이 금방 나는 것이 아니어서 그의 경우는 합격 후 4년 만에 발령이 납니다. 발령 날 때까지 기회 있을 때마다 서울에 가서 사정을 알아보아야 했습니다. 그의 아들도 무과에 도전하는데 부친과 마찬가지의 전철을 밟았고, 더구나 아들은 무과합격 후 발령까지 10년 넘게 걸렸습니다. 오로지 과거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것입니다.

 

Q. 일본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이유에 대한 최근 일본학계의 주목할 만한 연구 동향이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박광준 교수  에도막부는 1854년 개항 이전까지는 쇄국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했습니다. 당시 외교통상관계를 가진 나라는 네덜란드, 청나라, 조선, 류큐(琉球. 현,오카나와) 4나라였습니다. 조선과 류큐는 정식의 외교관계를 가진 나라 즉 통신국이었는데 조선과는 츠시마(對馬)번이 중개하고 류큐와는 사츠마(薩摩)번(지금의 카고시마)이 중개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청나라와 네덜란드는 정식의 국교를 맺지 않고 막부의 직할지인 나가사키를 통하여 무역만을 행하는 통상국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네덜란드, 조선, 류큐를 이적시하는 풍토가 있었습니다. 동아시아 중에서도 일본은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비교적 잘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중국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자 개혁이야말로 유일한 활로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고, 그만큼 개혁에 대한 합의가 보다 폭넓은 계층에서 형성되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거기에 서구식의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는 역사문화적인 전통이 있었습니다. 즉, 에도 시대에 자본주의적인 생활양식이 사회전반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세계 자본주의시스템으로 보다 자연스럽게 편입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6세기경에 성립한 소농사회를 배경으로 하여 발생한 소위 ‘근면혁명’은 그 본질적 요소가 자본주의적이었습니다. 또한 법 집행을 철저하게 시행하는 법가적 전통, 공권력이 말단의 마을까지 미치는 관리체제 역시 개혁의 성공요인이었을 것입니다. 단발령(斷髮令)은 좋은 비교 재료입니다. 일본은 1871년에 촌마게(조선의 상투와 유사한 머리형) 자르는 것을 장려하는 법을 시행하였지만 호응이 적었는데, 2년 후 메이지 국왕이 촌마게를 자르자 급속히 보급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조선에서는 고종 스스로가 상투를 잘라 보였으나 그에 대한 민중의 호응은 적었고, 1895년 강제적인 단발령에 대한 반발은 상상 이상으로 커서 강원도 관찰사가 성난 군중에 의해 살해될 정도였습니다. 법의 내용도 시행방법에도 차이는 있지만, 군주에 대한 국민의 인식에도 차이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공업화의 추진에는 중앙집권체제하에서 관료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1870년에는 공부성(工部省)이 설치되었는데,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에서 서양의 기술인력을 직접 고용하여 기술을 도입하고 공업인력을 육성하였습니다. 그들의 급료는 일반 공무원의 약 20배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과학기술에 대한 가치를 높이 평가했던 사회이며 그 점은 조선과 다른 점입니다. 한 가지 눈 여겨 볼만한 것은 일본과 조선이 새로운 기술과 국가체제 만들기를 위하여 선진국에 시찰단을 파견했고, 보고서가 제출되었는데 양국이 큰 차이점을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의 소위 이와쿠라 시찰단은 107명으로 구성되어 1871년부터 2년에 걸쳐 미국과 선진 유럽 국가를 시찰하고 서구지향이라는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돌아왔고, 사절단의 보고서(米欧回覧日記)는 일본 근대국가형성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조선에서 고종은 1881년 조사(朝士)시찰단을 전액 조선의 부담으로 일본에 파견한 바 있었습니다. 12명의 조선 선비에 수행원 통역관 등 모두 64명으로 구성된 시찰단은 약 4개월간 일본을 시찰하고 총 80여권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고종에게 제출하였습니다.

 

그 보고서는 일본이 부국강병을 달성해가고는 있지만 산업화 추진과정에서 누적된 국채로 말미암아 국가재정이 파탄되었다고 보고 있고 메이지 유신 역시 반드시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보고서는 한문으로 작성되었으며 그 내용이 공개적으로 출간되지 않고 고종의 개인장서로 보관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시찰단의 구성원은 개화파와 척사파가 섞여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입장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기와는 달랐다고 할 것입니다.

 

Q. 일본 붓교대학(佛敎大學{)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박광준 교수님은 붓교대학에서 무슨 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박광준 교수  붓교대학은 1912년에 설립되어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대학으로 쿄토시에 위치하고 있는 중규모 대학입니다(https://www.bukkyo-u.ac.jp/). 오랫동안 문과계통의 학과를 가지고 있었으나 근래에 보건의료기술대학을 설치하여, 현재는 모두 7개 단과대학들이 있습니다. 저는 사회복지학부에 소속되어 있으며 ‘아시아의 사회와 복지’, ‘사회복지원론’ 등을 강의하고 있고 그 밖에 대학원생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학부의 전임교원은 약 30명입니다.

 

 

특히 사회복지 대학원 교육에서는 동아시아의 인재육성에 노력하여, 현재 10여명의 대학원 수료생들이 한국, 중국, 타이완의 대학에서 전임교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12년간 교수생활을 했고, 중국사회과학원(北京)의 방문학자와 시베이대학(西北大学. 西安) 객원교수를 지냈습니다. 현재도 옌벤대학(延辺大学) 대학원 객원교수이기 때문에 동아시아 사회정책 연구자들 간 교류에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주로 사회정책학회를 중심으로 활동합니다. 최근 약 20년 동안의 연구주제는 동아시아 사회정책의 비교연구, 동아시아 사회정책사상사 및 역사 비교연구입니다. 현재는 ‘조선왕조의 빈곤정책’의 후속연구서로서 ‘개항기, 식민지기, 미군정기 등 대한민국 건국까지의 사회정책’을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MeCONOMY magazine January 2020

 

 

※ 지난 호(상편) p118 바로잡습니다.

 

예를 들어, 대동법 시행의 산파역이었던 김육(金堉, 1580-1658)은 말하자면 경제기반을 가지지 못한 인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연마와 후학 양성에 진력한 이황의 가문은 방대한 토지와 더불어 수백 명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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