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을 ‘인조의 사랑을 듬뿍 받은 정원’이라고들 하지만 조선 16대 왕인 인조를 우리는 성군으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반정(反正)으로 큰아버지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거나 병자호란, 정묘호란과 같은 국가적 위기를 초래한 임금이라는 냉소적 평가가 더 많다.
인조가 임금이 된 후 조선 사회는 과격해진 정치가, 사상가의 충돌로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을 것이다. 반정으로 권좌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을 역사에서 지우려 애썼다는데 광해군이 기초한 창덕궁을 인조가 아름다운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완성하였다는 것이 어쩐지 역사의 아이러니같다.
2019년 10월 27일의 창덕궁 후원의 공기는 깨끗하고 하늘은 청명하였다. 아직 이른 탓인지 깊은 가을의 정취는 없었지만 차곡차곡 쌓아둔 교우들의 추억이 모여 창덕궁 후원의 가을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사소함까지도 챙겨주신 선배님들, 선배님들이 살아가는 길에 경의를 가지고 있는 후배들 모두가 자연을 무대로 멋진 스토리를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교우의 관계 형성은 와세다대학이 추구하는 ‘안이한 실용주의가 아닌 진취의 정신’, ‘자유주의’의 실천이리라.
산책 후 점심식사는 불고기정식이었다. 유학생활을 할 때 고국생각이 날 때마다 불고기를 추억하였을 교우들은 오늘 제대로 된 맛있는 불고기를 포식하였다. 윤영노 회장님과 원로분들의 교우회 발전을 위한 메시지는 마치 2020년을 밝히는 도원의 결의와 같았다.
오늘 행사에는 새 교우 두 분과 오랜만에 참석하신 교우가 자리를 더 빛내 주었다. 윤영노 회장님께서 준비하신 선물과 참석하신 분들의 축하는 새 멤버와 교우회를 연결하는 실타래가 될 것이다.
점심식사 후에는 윤영노 회장님께서 북촌에서 가장 맛있다고 이름난 카페에서 후식을 마련해 주셨다. 세월과 세대를 초월한 선후배 간의 격의 없는 대화 공간에서는 아주 작은 것도 화제가 되었다. 와세다대학을 상징하는 연지색이 화제가 되었으며, 연지색에 와세다대학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쓰신 회장님으로 이야기가 발전하였다.
교우란 그런 것이다. 그럴듯한 자리나 무게 있는 곳에서는 화제에 오를 수 없는 사소한 얘기도 동질적인 이야기 꺼리로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동학(同學)인 것이다. 선배님께서 꺼내주신 음식과 맛집에 관한 얘기는 곧 ‘교우 맛집기행’으로 현실화될 것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과 강력한 쓴맛을 가진 에스프레소가 맛있는 아포가또(Affogato)로 앙상블이 되듯이 와세다대학 교우는 다른 학교 출신보다 개성과 자존감은 강하지만 모이면 쉽게 아포가또가 된다. 그래서 오늘은 아포가또와 같은 하루였다.
영국의 역사가이자 정치가 에드워드 헬릿 카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하였다. 오늘 와세다데이는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대화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의미있는 날이었다. 인조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는 ‘인조의 뜰’ 창덕궁 후원에서 혼란의 시대를 살았던 인조는 무엇을 사색하였을까 라는 해답은 여전히 풀리지 않지만 와세다대학 교우회 2020년의 해답을 모두가 공유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