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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한국 정신문화를 찾아서(9) ...다시 보는 개벽사상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요즘 나라 안팎이 어지럽다. 전직 대통령들이 구속돼 있으면서, 또는 외부 활동이 제한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광화문과 국회 앞에선 시위가 그칠 새가 없다. 제조업 노조에서 건설노동자들까지 파업을 벌이고 있다. 거리와 시장 바닥을 일터로 삼아 새벽부터 늦 은 밤까지, 혹은 24시간 불 켜놓고 일하는 자영업자들이 ‘못 해 먹겠다!’고 난리다. 기업가들은 기업가들대로 숨 막힐 것 같은 규제에 분을 삭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 경제는 미중 무역전쟁과 일본의 수출규제라는 악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실로 내우외환에 처해 있는 지금, 복잡한 정치경제학적 처방보다 우리 역사에서 지혜를 찾아보는 일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때마침 숭실대 철 학과 곽신환 교수가 올해 정년퇴임을 앞두고 한국철학사상연구소에 '19세기 조선과 정역사상'이란 역작의 논문을 썼다. 그를 연구실 에서 만났다. 정년퇴임하는 교수들 중에 전공 책을 불태운 뒤 전공과 완전히 결별하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이와는 달리 정년 후에 더욱 공부에 매진하는 교수들도 있다고 하는데 곽신환 교수는 후자인 듯하다. 앞으로 쓸 책 제목 10여개를 써놓고 있으며 곧 ‘율곡’에 관한 신간이 나올 거란다.

 

Q. 19세기를 특별히 주목하고 글을 쓴 이유는 무엇인지요?

 

곽신환  조선의 백성들은 18세기 중반 이후에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열망이 강렬해졌습니다. 1801년 신유사옥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가톨릭 지도자 300명이 참수를 당했습니다. 주로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강원 영서 지역에 분포된 가톨릭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중국인 신부 주 문모, 이승훈, 정약종 등이 처형되고 정약용은 유배를 갑니 다. 1811년에는 서북지역에서 홍경래 난이 일어납니다. 왕조실록에는 홍경래 난을 서난(西難)이라고 썼는데, 난을 亂으로 쓰지 않고 難으로 기록했는데, 이것은 왕조 체제를 심하게 위 협한 난으로 인식했음을 나타냅니다.

 

홍경래 난은 갑작스럽 게 충동적으로 일어난 난이 아니라 오랫동안 준비돼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서북 지역 큰 고을 여덟 개가 난을 일으킨지 얼마 되지 않아 홍경래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기세도 강하기도 했겠으나 동조자들이 그만큼 많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관군은 홍경래가 있던 정주성을 포위하고선 당시 조선에 있던 거의 모든 폭약을 묻어 폭파시켰는데, 그 파편에 맞아 홍경래가 즉사했습니다. 그러나 평안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선 홍경래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홍경래는 미륵 혹은 정도령 또는 메시아 같은 인물로 남았습니다. 평안도 사람들은 홍경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평안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럴 정도로 평안도 사람들에게 조선왕조는 희망이 없는 정부였습니다.

 

1862년 임술년에는 진주 북쪽 단성이라는 크지 않은 고을에서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원인은 삼정문란이었습니다. 이 난은 곧 경상도로 퍼졌고 이어서 전라도, 충청도, 제주도로 번졌습니다. 그해 전국의 72개 고을에서 민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홍경래난은 정부를 뒤집어엎자는 난이었다면 삼정문란에 의한 민란은 ‘이제는 더 이상 못 살겠다’는 항거였습니다. 임술민란 두 해 전에 최제우가 동학을 선포했다고 해서 붙잡힙니다. 최제우는 혹세무민했다는 이유로 1865년 대구감영에서 처형됩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894년에 동학농민 항쟁이 일어납니다. 최제우는 30년 전에 죽었는데요, 동학농민항쟁은 최제우의 정신과 가치를 이어받은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것입니다. 최제우가 내세운 핵심적인 구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개벽’입니다. 동아시아에서 ‘개벽’은 1차적으로 우주의 개벽을 말했어요. 이 천지가 끝나고 새하늘과 새땅, 새질서가 지배하는 세상이 이 땅에 와야 된다는 사상입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잘 살 수 있는 새세상으로 바꿔야 하고 바뀔 것이라는 당위적 요청이 신앙화 된 것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에 최제우만 ‘개벽’을 말한 것이 아니라,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개벽’ 사상을 부르짖는 지도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일각에서 그런 사람들이 한 스승 밑에서 공부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주장은 확증해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무튼 개벽사상을 근간으로 해 동학 외에 증산교, 보천교, 일부교, 대동교, 대종교 등이 생겨났습니다. 1900년초에 조선 인구를 1,700만 정도를 보는데요, 당시 보천교 신자가 200만명이 넘었다고 전합니다. 이들 신흥종교들의 핵심 사상은 ‘개벽’입니다.

 

이 ‘개벽’은 한 마디로 ‘더 이상 못 살겠다. 이럴바엔 이 나라도, 이 지구도 없어지는게 낫다. 새하늘과 새땅이, 새로운 질서가 지배하는 세상이 와야만 한다’는 신념과 소망, 울부짖음의 표현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의 19세기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신유사옥이 일어났을 때 천주교도들에 대한 공초기록이 남아 있는데요. 그걸 보면 ‘저들(천주교도로 붙잡혀 온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저들은 얼굴이 환해! 조금도 부끄럼이 없어! 웃으면서 우리들의 고문을 견디고 있어’라 는 기록들이 보입니다. 공초를 하던 관리들은 ‘저들은 아무리 협박하고, 또 회유해도 굴복하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대책이 서지 않습니다’라고 위에 보고했습니다. 이 당시 천주교도들은 더 이상 현 체제 속의 삶은 우리들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Q. 개벽 사상을 내세운 사람들 중에 일부 김항 선생의 정역이 있습니다. 정역을 읽어보았습니다만, 해설한 것을 읽어 봐도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정역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곽신환  정역 원문은 길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걸 읽고 분명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주역을 정통으로 공부했다고 해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대만이나 중국, 일본의 역학자들도 정역을 해 석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제가 1989년 타이베이에 1년간 연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대륙에서 오신 분으로 고회민이라는 주역 대가가 있었어요. 그분에게 정역을 보여줬더니 그분의 말씀이 ‘소강절 역학이네요’ 하더군요.

 

일부 김항 선생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일부교가 신흥종교의 형태로 충청도와 전북, 대구 일대에 있었는데 교세가 크지 않았습니다. 충남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기도 한 학산 이정호 선생님은 정역을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올려놓으신 분입니다.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려면 그것이 ‘역사성’과 보편적 ‘윤리성’을 띠고 있어야 합니다. 정역은 신흥종교적인 요소도 들어있고,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깜짝 놀랄만한 혁명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정역 속에 들어 있는 혁명적인 내용을 말씀드리면 지난 2,000년 내지 3,000년간 우리의 삶과 자연을 설명해온 서경과 주역의 틀은 이제 맞지 않다는 것이죠. 더 이상 서경과 주 역을 읽고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왔으므로 서경과 주역으로는 안 되고 정역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이란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진리가 되는 사회로서 새시대가 왔다고 선언했습니다. 김항은 종래의 음을 누르고 양을 높이던 시대가 가고 음과 양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조양율음(調陽律陰), 즉 남녀평등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19세기 조선왕조 멸망 원인
 

조선왕조의 멸망 원인은 여러 가지로 꼽을 수 있겠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주자학적 인간관과 세계관에서 비롯된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질서이고 그다음 상공업의 천시, 쇄 국정책이었다고 보는 것은 통설이다.

 

양반계급만이 과거시험을 볼 수 있었고 벼슬에서 물러나고 난 뒤에 농업도, 상공업에도 종사하지 않고 오로지 책 보는 일로만 소일했다. 조선 전기에 10%였던 양반 비중이 후기에는 30%에 이르렀다. 전 국민의 3분의 1이 일을 하지 않고도 특권을 누리며 살 수 있었던 세상이었다. 양반은 토지를 소유하고 노비들이 농사를 지었다. 이에 반해 상민은 무거운 조세와 신역 부담에 짓눌렸고 19세기 삼정문란으로 민란이 끊이질 않았던 것이다.

 

조선의 쇄국정책도 멸망의 주요한 원인이다. 주로 중국과의 조공무역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일본 통신사를 통한 무역은 조선왕조 내내 12회에 불과했다. 산업이 흥기하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나날이 강해지는 서구 열강과 교류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나라 문을 꼭 닫아두고 있었다.

 

개벽 사상은 주자학적 신분차별을 철폐해 평등·생명성 회복하자는 것
 

‘개벽’이란 말을 맨 먼저 말한 이는 ‘수운 최제우’다. 개벽사상의 가장 큰 의의는 새로운 세상으로 ‘개혁’하자는 자체에 있다고 본다. 조선왕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엄청난 국난을 당했음에도 근본문제를 고치고 해결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그토록 조세와 신역으로 고통을 받고 찢어지게 가난해 집을 버리고 떠돌아 다녀도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한 양반 지배층들은 개혁하지 않았다.

 

신분제 사회는 다른 나라에도 존재하였지만, 조선왕조의 왕과 지배층 같이 ‘지독할 정도로’ 무심한, 무능한, 무책임한 보수성을 보인 경우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동서양 역사를 보면 지배층이 스스로 기득권을 양보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영국의 명예혁명이 그런 희귀한 사례다. 대부분은 프랑스 혁명과 같이 피를 뿌리는 내부 혁명이나 조선왕조처럼 외세에 의해 멸망하고 나서야 변화를 수반했다.

 

피를 부르는 내부 동란이나 외세의 개입을 받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를 지배층이 수용하는 것임 을 조선왕조 19세기 역사에서 알 수 있다. 개벽사상은 오늘 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 속에서도 금과옥조와 같이 ‘개혁정신’으로 내면화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좋은 제도와 사상이라고 해도 인간과 집단은 환경의 변화로 인해 끊임없이 개혁이 요구되는 법이다. 한 국가나 조직이 ‘개 벽정신’ 즉 ‘개혁정신’에 늘 열려있는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 굴곡이 있어도 성장 발전하는 것은 역사적 진리이다.

 

개벽 사상은 또 주자학적 신분차별 제도와 인간관에서 탈피 해 사람다운 삶,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데 있었다.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근원적 인간 해방과 생명성을 주창한 사상으 로서 일찍이 동양에서는 없었던 외침이자 깨달음이었다.

 

 

수운 선생의 깨우침은 ‘시천주’란 말에 다 들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믿음이다. 한울님 을 각자 안에 모시고 있으므로 양반과 상민의 차별은 없고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이다. 신분차별이 엄격했던 당시에 수운과 그의 제자 ‘해월 최시형’은 그런 믿음을 몸소 실천해 보였다. 천대만 받고 살며 기댈 곳이라곤 전혀 없었던 백성들이 동학에 구름처럼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해월 최시형은 시천주 사상을 확장해 사물도 한울님처럼 공경해야 한다는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삼경(三敬) 사상을 주장했다. 이는 우주와 사물과 인간이 하나로 연결돼 있으며 인간이 중심이 돼 서로 아끼며 존중하자는 세계관이다. 해월 선생의 경물 사상은 친환경주의 사상의 시조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개벽사상은 현대적인 의미로 ‘개인 주체 정신’이라고 적극적 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우리나라와 동양에서 부족한 개인의 주체성,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 자율성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 19세기 개벽 사상은 이를 표방했던 지도자들이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정기를 보존하고 민족을 깨우치는 방편의 하나로 종교화되면서 그 의의가 축소되고 잊히고 있는 듯하다. 이제 개벽 사상을 민족종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정 치경제적 사상과 원리로 다듬어지고 우리다운 실천적 시민 정신, 창조적 경제정신 덕목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MeCONOMY magazine Septembe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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