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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계와 향가로 어우러진 신라 불국토 정신문화

【한국의 정신문화를 찾아서-15】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현대인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근원적 조건인 불안을 너무 의식하고 있는데 반해 그 불안을 달래주고 미래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해주는 종교적 신앙심이 거의 퇴화해가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는 한편 개별 인간은 자기만족과 인권의식에 대해선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고 가족과 공동체 윤리와 연대감엔 불편해하면서 자기 파멸적 허무주의와 분열의 고통을 겪고 있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의 정신과 정치·경제·사회의 위기는 여기에 그 원인을 두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한국도 선진국에 서서히 진입해가면서 선진국들이 고통받고 있는 실패의 경로를 그대로 추수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도덕윤리를 숭상해왔고 하늘(하느님)에 대한 신심이 깊은 가운데 자연과 인간, 인간 상호 간의 조화를 추구해왔다. 우리가 서구 선진국들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국의 철학과 사상의 좋은 점을 되살려 오늘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종교적 믿음과 실천이 왕에서부터 귀족, 화랑, 백성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일치된 시대가 있었다. 신라의 통일 전후 시기와 전성기였다. 학자들은 그 시기를 제23대 법흥왕(514-540)에서 제49대 헌강왕(875-886)까지로 본다.

 

헌강왕 때 기와집이 즐비하고 숯으로 밥을 짓고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법흥왕은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했다. 법흥왕은 나이 들어 법공이란 법명을 짓고 출가하여 흥륜사에 머물렀다. 법흥왕의 왕비도 묘법이란 법명으로 영흥사에서 만년을 보냈다.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은 37년간 왕위에 있었는데 법흥왕 때부터 조성하고 있던 흥륜사를 완공한데 이어 승려의 출가를 허용했다. 진흥왕은 뿐만 아니라 황룡사와 장육존상도 조성했으며 말년에는 법운이라 칭하고 승복을 입었다.

 

진흥왕의 왕비도 법명을 묘주라고 칭하고 영흥사에 거하였다. 진흥왕은 전륜성왕을 자처하고 신라에 불국토를 건설하려고 했다.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는 화랑도를 만든 것도 진흥왕이다. 화랑은 15-18세의 진골 출신 자제들로서, 1인의 화랑 아래 두품 출신 이하 700-1,000명의 낭도로 구성돼 있으며 극소수의 승려 낭도들이 속해 있었다. 화랑은 전투에 임할 때는 낭도를 이끌고 부친 등이 이끄는 혈족 부대에 참전했다.

 

진평왕대에 화랑이 7명 있었는데 전체 화랑도 소속 낭도는 5,000~7,000명 이라는 추산이 가능하다. 여러 화랑의 대표자는 국선으로 불렸다. 김유신, 기파랑 등이 대표화랑이었다. 화랑의 의미는 진골 출신의 자제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는 데에 있다. 원광법사로부터 세속 오계를 받은 귀산과 추항은 세속 오계 중 ‘임전무퇴’, 즉 적과 싸울 때 물러서지 않는다는 계를 실천하여 승전했으나 온몸이 창칼에 찔려 돌아오던 중 숨졌다.

 

귀산은 위급 중에 자신이 타던 말에 아버지를 태워 보내고 벗인 추항과 함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김유신의 형제인 김흠춘(흠순)도 화랑이었는데 장성 후 재상으로 발탁되었다. 김흠춘의 아들인 반굴은 김유신과 부친과 함께 황산벌 전투에 참전했다. 백제의 용장 계백과의 전투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버지의 명을 받아 출전해 전사했다.

 

반굴의 아들인 김영윤도 고구려 잔적을 토벌하는 부대에 참전했다. 토벌대 장수들이 잔적들의 항전 기세에 눌러 일시 후퇴를 결정했다. 김영윤은 적을 앞에 두고 물러섬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라며 홀로 적진에 나가 싸우다가 죽었다. 반굴이 집안의 명예를 걸고 싸우다 숨진 황산벌 전투에서 또 한 명의 화랑인 관창이 아버지 품일 장군을 따라 참전했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계백 장군이 붙잡힌 관창의 투구를 벗기니 어 린 소년임을 알고 신라에는 용감한 소년들이 많다고 감탄한 대목이 나온다.

 

 

황산벌 전투에서 진골 가문의 자제들이 잇달아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것이다.   김흠운은 나밀왕의 8세손으로 화랑이었다. 백제군들이 야음을 틈타 성루를 빼앗고 새벽에 신라군을 향해 화살을 빗발치듯 쏘아댔다. 일대 혼란에 빠진 중에 김흠운을 시종한 대사 ‘전지’가 이르기를 “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니 지척에서도 분간할 수도 없고, 따라서 공이 비록 죽더라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공은 신라의 진골이며 대왕의 사위이므로, 만약의 적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 의 자랑거리가 되고 우리의 대단한 수치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흠운은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친 이상, 남이 알든 모르든 마찬가지다. 어찌 감히 명예를 추구하겠느냐?”며 적과 싸우다가 죽었다. 흠운이 죽었다는 말은 들은 장수 보용나는 “그는 골품이 고귀하고 권세가 영화로워 사람들이 사랑하고 아끼는데도 오히려 절개를 지켜 죽었다.

 

하물며 나 보용나는 살아서 무익하고 죽어도 손실 없을 것”이라며 말하고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여럿 죽이고 자신도 전사했다. 그때 사람들이 이들의 죽음을 보고 양산가를 짓고 추모했다.  화랑들은 전장에서의 용기뿐만 아니라 우애와 효에서도 모범을 보였다. 사다함은 나물왕의 7세손의 진골 출신 화랑이다. 사다함을 따르는 낭도가 1천 명에 이르렀다. 사다함은 십오륙 세의 나이임에도 가라국 기습전에 참전하기를 간청하여 큰 공을 세웠다.

 

사다함은 전공으로 받은 가라국 백성 3백 명을 전부 풀어주어 양민으로 살게 하고 하사 받은 토지를 사양하는 대신 불모지만 받았다. 사다함은 17세에 목숨을 같이 하기를 약속한 무관랑이 병사함에 슬피 울다 7일 만에 죽었다.  진골이라고 함은 왕손이라는 말인데, 진골의 어린 자제들이 노블리제 오블리제를 보이자 두품 출신의 장수들도 그들의 충절과 효행을 본받았다. 진덕왕 원년 김유신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은 백제의 정예군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사기가 크게 꺾여 있었다.

 

신라 진중에 비녕자라는 무인이 그의 아들 거진과 종 합절과 참전하고 있었다. 김유신은 비녕자의 용감함을 알고 선봉에 나서 병사들의 사기를 일으켜 주기를 원했다. 비녕자는 기꺼이 홀로 나가 싸워 죽을 것을 맹세했다. 비녕자는 전장에 나가기 전, 그의 종 합절에 게 말하기를 “나의 아들 거진은 나이 비록 어리나 장한 뜻이 있어서 틀림없이 나를 따라 죽으려 할 것인데, 만일 부자가 같이 죽는다면 집안 사람이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랴. 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잘 수습하여 돌아가 그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라.”고 하였다.

 

비녕자는 이렇게 말하고 적진에 돌진하여 여러 사람을 죽이고 전사했다. 거진이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싸우려 나가려고 하였다. 합절은 “대인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서 부인 마님을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아들이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어머님의 자애를 저버린다면 효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 까?”하고 합절은 말고삐를 잡고 놓지 않았다. 거진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도 구차하게 산다면 이것이 어찌 효자이겠느냐?”하고 합절의 팔을 치고 적진으 로 달려가 죽었다.

 

합절은 “상전이 모두 죽었는데, 내가 죽지 않으면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말하고 그도 싸움에 나가 죽었다. 군사들은 세 사람의 죽음을 보고 감격하여 앞다투어 나아가 적을 대파하였다.  (「삼국사기」, 정민호 현토, 명문당)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었는데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을 용화향도라고 불렀다. 용화향도란 말은 미륵신앙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진흥왕 때 처음으로 잘생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시켜 화랑으로 떠 받들었더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남자를 곱게 꾸민 것은 「미륵하생경」을 따른 것이다. 신라는 왕경에 부처님 이전 전불시대 가람터 7곳을 정하고 각각 사찰을 조성하였다. 황룡사는 여섯 번째 부처인 가섭불이 설법했다는 연좌석이 있었던 터에 지은 가람이다. 


보살계와 향가가 어우러진 사회 결속의 힘


미륵신앙은 신라와 백제가 서로 쟁투를 벌이던 진평왕과 무왕 시대에 번성했다. 신라에 황룡사가 있었고 백제에는 그에 질세라 미륵사가 있었으며 양국의 왕들이 스스로 전륜성왕을 표방했다. 신라는 출가한 승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보살계를 널리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보살계란 보편적 도덕윤리라고 할 수 있는데 보살계의 실천은 사회적 결속을 높이고 개인의 고상한 정신을 북돋우게 된다. 향가는 전란과 재난 속에 한없이 미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적 슬픔을 어루만져주고 초월적 기원을 담고 있다.

 

신라의 왕들과 귀족들, 승려들과 백성들이 즐겨 불렀던 향가는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통한 사회통합을 강화시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임동주 박사의 논문 「신라불교와 윤리사상 연구」에 따르면 신라의 불교 계율은 진흥왕 때 시작된 팔관재회와 원광의 세 속 오계, 자장의 계율 확립, 원효의 대승 보살계의 전파로 인해 백성들의 삶에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팔관재회는 재가신자들이 보통 엿새간 불교의 8가지 계율, 즉 살생, 도둑질, 음행 등을 금하고 마지막 날엔 오전 한 끼만 먹는 의식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의 팔관재회는 전래의 민속신앙과 불교의 팔관재계를 습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불교의 신라적 수용은 귀족과 백성들이 느끼는 이질감을 해소하고 새로운 보편적 가치에 눈을 뜨게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광은 세속오계에 임전무퇴와 살생유택을 포함시키는 유연성을 보임으로써 호국불교사상의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당에서 불법을 공부하고 여러 가지 이적을 보였던 자장은 신라로 돌아와 황룡사에서 「보살계본」을 7일 밤낮으로 강연하였다.

 

강연 중에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강당을 덮었는데 청중들이 모두 탄복하였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대국통이 된 자장은 전국의 승려들이 계율을 잘 지키는지 정기적으로 시험을 치는 등 교단의 체계를 바로 세워나갔다. 이때 계를 받고 불법을 받는 이가 열에 여덟, 아홉 집은 되었으며 중이 되기를 청하는 자가 나날이 늘어났다고 한다. 이에 통도사를 창건하고 계를 받는 단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제도하였다고 삼국유사는 적고 있다.  

 

원효는 240여권에 달하는 불교저술을 남길 정도로 대학승일 뿐만 아니라 무애의 마음으로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시켰다. 이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과 산골에 사는 무지몽매한 자들까지도 부처를 알게 되었고 모두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원효는 계율 해설서인 「보살계본지범요기」를 지었다. 이 보살계본 해설서 중에 자찬훼타(自讚毁他: 자신을 높이고 타인을 비방하는 것)에 대한 논설은 오늘날 보더라도 배울 점이 있어 소개한다.

 

원효는 어떤 사람의 신심을 일으키기 위하여 자찬훼타 하는 경우는 오히려 복이 된다고 봤다. 또 다른 사람의 그릇된 고집이나 견해를 버리게 하고 올바른 길을 제시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자찬훼타도 대복이 된다고 말했다. 반면에 자신의 이익과 공경을 받기 위하여 자찬훼타 하면 중대한 잘못을 짓는 것이며 자신의 장점을 낮추고 단점을 자랑 삼고, 타인의 단점을 훌륭한 것으로 추켜세우고 그의 장점을 깎아내리는 것은 죄라고 갈파했다. (임동주, 「신라불교 윤리사상 연구」, 2012)  향가는 단순한 서정적 시가가 아니라, 불교적 신심과 감성적 서정성으로 묶어주고 승화시킨 위대한 금자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승려 낭도이기도 한 월명사가 지은 <제망매가>는 향가 중의 백미다. 


생사의 길은

여기 있으매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도 모르는구나
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는 도 닦으며 기다리련다.


월명사는 향가에 능하다고 스스로 밝혔으며 도솔가도 지었다. 그는 사천왕사에 쭉 머물렀으며 피리를 잘 불었다고 전한다. 월명사와 같이 승려 낭도로 추정되는 충담사가 기파랑이란 화랑을 그리워하여 지은 <찬기파랑가>도 깊은 감동을 준다. 

 

열치며 나타난 달이

흰 구름 따라 떠난 자리에

새파란 시내 기파랑의 모습이 있구나 

일오 시냇가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셨던 마음의 끝을 따르리라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눈도 덮지 못할 화랑이여.

(「삼국유사」, 신태영 역, 한국인문고전연구소) 

 

MeCONOMY magazine July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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