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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자기 고백의 희망’ ... 기형도 30주기

 

- 3월7일 기형도 30주기, 그를 기억하는 다양한 방식

- ‘신화’에서 이제 ‘역사’로서 다시 쓰이는 기형도

 

 

“7일 새벽 4시경 서울 종로구 낙원동 207 파고다극장 2층 관람석에서…”
 

1989년 3월7일자 <동아일보> 14면.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사건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극장에서 죽은 사람의 이름은 기형도.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시인 기형도다. 앞의 기사를 계속 이어가 보자.
 

“…중앙일보 편집부 기자 기형도씨(32·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인)가 의자에 앉은 채 숨져 있는 것을 이 극장 경비원 박명규씨(50)가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기형도는 시인보다 먼저 기자라는 타이틀을 먼저 달고 이듬해 1985년 신춘문예시 부문에 당선되며 시인이 된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는 그 유명한 ‘안개’다. 다시 기사로 돌아가 본다.
 

“박씨에 따르면 이날 심야프로인 ‘뽕2’ 상영이 새벽 3시50분경 끝난 뒤 관객 30여명이 극장을 모두 빠져나갔으나 기씨가 계속 앉아 있어 다가가 보니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채 이미 숨져있었다는 것. 경찰은 기씨가 외상이 전혀 없으며 입고 있던 잠바와 가방에 구토한 흔적이 남아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술을 마신 뒤 영화를 보던 중 쇼크로 숨진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 중이다.”
 

절망과 희망을 노래했던 시인은 애로 ‘방화’(邦畵)를 관람하던 중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시인은 ‘뽕2’를 보다가 사망했을까. 그러면 시인다운 죽음이라 할 수 있을까. 당시 파고다 극장은 동시상영관으로 ‘뽕2’말고도 성룡의 ‘포리스스토리’(폴리스 스토리)를 함께 상영하고 있었었다. 동시상영은 영화 한 편 값으로 두 편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기형도는 ‘폴리스 스토리’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지 않았을까.

 

이런 의문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기형도가 30주기가 되는 올해는 ‘뽕2’와 ‘폴리스 스토리’사이 어느 시점에 죽음이 그에게 ‘안개’처럼 찾아들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사망 30주기,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는 기형도
 

기형도가 ‘80년대스러운’ 죽음을 맞이한지 30년이 지났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를 찾았다. 지난 3월2일에는 천주교 안성추모공원에서 ‘기형도 30주기 추모 제’가 열렸으며, 3월5일에는 기형도문학관과 (재)광명문화재단이 광명시민회관에서 ‘정거장에서의 충고’라는 이름으로 기형도 30주기 추모 콘서트를 열었다. 그의 기일인 7일에는 시인의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 ‘신화에서 역사로-기형도 시의 새로운 이해’라는 이름으로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같은 날 저녁 동교동 다리 소극장(가톨릭청년문화공간)에서 문학과지성사가 주관하는 ‘기형도 30주기 낭독의 밤’ 행사가 진행됐다. 3월 한 달 동안 기형도 문학관에서는 기형도 시를 주제로 한 일러스트 전시회도 열렸다.

 

 

문학과지성사는 기형도의 유일한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에 수록된 시 61편과 미발표작 시 36편을 한데 모은 기념시 집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와 2000년대 이후 등단한 젊은 시인 88인이 쓴 88편의 시를 모은 트리뷰트 시집 <어느 푸른 저녁>을 출간했다.
 

‘신화’에서 ‘역사’가 된 기형도
 

지난 3월7일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백주년기념홀에서 ‘기형도 시인 30주기 추모 심포지엄’이 열렸다. ‘신화에서 역사로. 기형도 시의 새로운 이해’라는 제목의 이날 심포지엄에서 기형도의 시를 다시 한번 깊이 들여다보고 지금 그의 시가 갖는 새로운 의미를 찾는 자리였다. ‘요절’, ‘천재 시인’이라는 신화에서 그의 시에서 현재성을 찾는 작업인 셈이다.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는 “지금 여기의 역사로, 지금 여기의 감각으로 호명된다는 의미”라며 “기형도가 역사로 간다는 것은 기형도가 다시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해주길 바라며 이번 심 포지엄이 기형도의 다른 역사가 시작되는 심포지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유성호 한양대 교수의 발표에선 기형도가 80년대 엄혹했던 시절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엿볼 수 있었다. 유 교수는 기형도의 시 ‘대학시절’을 언급하며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중반까지, 철학에 매료되었던 기형도는 청년으로서의 패기와 현실에 대한 책인 사이에서 무수히 갈등했을 것”이라며 “시와 현실 어디에도 집중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기형도는 연세대 79학번이다) 유 교수는 “시인은 한 시대의 큰 흐름을 따르지 못하는 상황으로 스스로 몰고 간다”며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라고 말하듯이, 자신이 의지하고 싶은 존재들은 그쪽에서부터 자신을 막아서니 그로서는 ‘외톨이’라는 의식을 떨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유 교수는 “그는 자신의 대학시절을 회상하면서 ‘나무의자’와 ‘은백양의 숲’과 ‘청년들’과 ‘돌층계’와 ‘총성’과 ‘목련’과 ‘감옥과 군대’와 ‘기관원’과 ‘졸업’ 이라는 80년대 캠퍼스의 세목을 완벽하게 재현한다”며 “그리고 마지막에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라는 기막힌 절구를 남겼다”고 평가했다.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기형도, 대학시절)

 

유 교수는 “(80년대) 미증유의 폭력이 남긴 잔상들은 정치적 상황 파악에 애써 무심했던 사람들의 무의식까지 지배했을 뿐 아니라, 동시대의 거의 모든 이들로 하여금 근대적 합리성의 파국을 가장 명료하게 경험하게 하기에 족했다”며 “야만의 시대가 남긴 끔찍하고 잔혹한 폭력성을, 그 시대를 살아간 많은 이들은 자신의 가장 어둑한 내면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1980년대는 시종 부당한 정치권력의 억압과 그에 저항하는 자유 의지 사이의 불가피한 갈등을 안고 펼쳐지게 된다. 이런 시대에 기형도의 대표작이 왕성하게 쓰인다”고 했다. 기형도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 ‘안개’가 대표적인 경우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 시를 꼽으며 기형도의 시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했다. 유 교수는 “한 개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시대적 폭력에 굴복하는 것과, 모르는 척하는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것 사이에서 ‘침묵’이 강요당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며 “사람들은 죽음과 폭력에 그동안 익숙해진 침묵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안개’라는 자연 현상에 서린 한 시대의 비극적 초상이 그 안에는 잘 담겨 있다”고 덧붙였다.

 

유 교수는 “1980년대에는 ‘홀로서기’ 같은 연성 흐름도 있었고, ‘인간시장’이나 프로야구 같은 대중적 흐름도 있었고, 박 노해나 ‘태백산맥’과 같은 저항적 흐름도 있었다”며 “그 사이에 그 어느 것과도 닮지 않은 기형도가 있었다”고 말했다. 기형도의 시의 키워드는 1980년대 주류였던 민중시들과는 달리 죽음, 도시, 기억 등을 불러내면서 투쟁과 희망보다는 죽음과 절망을 미학화하는데 집중했다. 그의 시는 그만큼 낯설고 불안한 세계에 반응하는 섬세한 자아의 내면을 비정하고도 차분하게 보여준다고 유 교수는 설명했다.

 

기형도의 ‘희망’ 그리고 ‘5월 광주’

 

강동호 인하대 교수는 기형도의 시를 몇 가지 층위로 파악하면서 그의 시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희망’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강 교수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어김없이 기형도는 통상적인 희망의 분위기와 상충되는 듯한 분위기를 부각시킨다”며 “희망은 늘 절망적인 진술들을 동반하며 곧 그것에 제압당하는 형국이 연출된다”고 지적했다. ‘정거장에서의 충고’라는 시를 보면 기형도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라고 과감하게 선언하면서도 마지막을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고 마무리하며 앞선 의지를 스스로 배반하는 식이다.

 

강 교수는 기형도가 말한 ‘희망의 정체’를 좀 더 분명하게 확인하기 위해 기형도가 대구, 광주, 부산 등을 여행하며 남긴 산문 ‘짧은 여행의 기록’(1988)을 언급한다. 그 글에서 기형도는 “그것을 편의상 ‘희망’이라고 부를 것이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라며 ‘휴가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다만 강 교수는 “기형 도의 희망은 특별한 새로움이 담겨 있지 않은,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전망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며 “기형도의 희망은 자신의 실존적 정당성을 해명하는 작업과 연동돼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과거 지향적인 측면이 있다”고 했다.

 

기형도는 대구를 거쳐 광주를 지나 부산으로 향하는 3박4일 의 여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진정한 목적지는 광주였다. 희망을 찾는 여정에서 목적지가 광주였던 셈인데, 강 교수는 당시 기형도가 당시 젊은 청년들이 그러했듯 광주에 대한 역사적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고 했다. 광주행을 그동안 미뤄왔던 기형도는 자신이 느끼는 부채감을 고백하지 만, 이를 해소하기 위해 광주를 가는 것이 기만행위가 아닌가 하는 기형도 특유의 자기 검열을 한다. 기형도가 광주를 향하던 길 위에서 자신이 쓴 여행 노트의 한 대목을 보고 놀란다.

 

“노트를 펼치다가 놀랐다. 표지에 HOPE라고 씌어 있었다. 내 여행이 ‘지칠 때까지 희망을 꿈꾸기’ 위해서였다면 이 노트 또한 내 의지를 돕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앉아서 성자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난 그 누구도 나에게 경배 하러 오지 않았다. 오히려 내 육체에 물을 묻히고 녹이 슬기를 기다렸다. 서울에서의 나의 행복은 산산조각 나고 있다. 내가 거듭 변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거듭 변하기 위해 나는 지금의 나를 없애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짧은 여행의 기록’, p.302)

 

그렇다면 광주에서 기형도는 그토록 찾던 희망을 찾았을까. 우선 기형도는 4시간 동안 머문 광주를 민주화의 성지라기보다는 “초라하고 궁핍했으며 무더웠고 지친 모습”이라든지 망월동 묘지에서 “변기 속” 가득 찬 “죽은 구더기들” 같은 표현으로 그로테스크한 풍경들을 그려낸다. 또 망월동 공원묘지를 찾아가는 방법을 모르는 광주 시민들을 기형도는 이해할 수 없"다. 희망이 아닌 실망이었을까. 기형도는 광주를 떠나기 직전 버스 안에서 “그러나 아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세 번 부정한다.

 

“그러나 아니다. 나는 광주에서 그 이상한 청년을 만나 것이 다. 어쩌면 전혀 예기치 못했던 역사를 만나고, 그 역사의 허망함에 눈뜨고, 지상을 떠난 청년들이 묘역에 잠들어 있다. 나는 무엇인가. 가증스러운 냉담자인가. 나에게 있어 국토란 무엇인가. 내가 탐닉해온 것은 육체 없는 유령의 자유로움이 었다. 지금 이곳의 나는 무엇인가. 너 형이상학자, 흙 위에 떠서 걸어 다니는 성자여. 어두워진다. 나의 희망은 좀 더 넓은 땅을 갖고 싶다.”(‘짧은 여행의 기록’, p.308)

 

강 교수는 “자기에 대한 부정 속에서 기형도는 내내 자신을 스스로 검열했던 자아를 ‘가증스러운 냉담자’라고 부르고, 과거의 자신을 ‘육체 없는 유령의 자유로움’을 탐닉해온 ‘형이상학자’로 묘사한다”며 “‘지금 이곳’을 말할 때 그가 명료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은 80년대라는 ‘예기치 못했던 역사’로부터 시인의 삶이 간섭받지 않을 수 없다는 깨달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강 교수는 “기형도가 ‘나의 희망은 좀 더 넓은 땅을 갖고 싶다’고 할 때 그가 탐색하고자 했던 ‘희망’의 방법적 원리가 점차 ‘역사적인 것’과 긴밀하게 연결돼가는 중이라는 짐작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날 강 교수의 발표 중 눈에 띄는 부분은 “기형도는 80년대의 시인이 아님으로써, 80년대의 시인이 아니지 않게 됐다”고 말한 부분이다. 1989년에 사망한 기형도가 80년대 시인이 아니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 강 교수는 “기형도의 육체가 끝내 도달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공간, 즉 90년대라는 시공간에 기형도의 시가 성공적으로 안착했다고 볼 수 있는가”라며 “90년대 많은 독자들이 그의 시에 호응했다는 표면적인 사실은 충분히 그렇게 판단할 근거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 교수는 “기형도 신화를 다시 역사화하기 위해서는 그의 시와 삶이 체현하고 있는 불화를 통해 80년대의 시적 현실을 재구성할 뿐만 아니라 기형도 신화를 구축한 90년대라는 시간, 정작 기형도는 한 번도 목격하지 못한 90년대라는 미래의 시간대를 해체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했다.

 

강 교수는 “기형도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는 과정에서도 그 자신의 삶이 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확신했다”며 “기형도가 광주를 떠나며 ”나는 희망은 좀 더 넓은 땅을 갖고 싶다“고 토로했을 때 그가 말한 땅은 80년대적인 역사적 지평과 긴한 관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가 살아서 두 번째 시집을 펴낼 수 있었다면, 90년대라 는 새로운 시간 속에서 자신의 땅을 발견하기 위한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을지 모른다”며 “그러나 그런 미래는 오지 않았고, 그가 희망과 함께 언급했던 ‘좀 더 넓은 땅’은 미지의 영역으로 90년대에 남겨져 버렸다”고 했다.
 

“완강히 버텨보리라, 난 천재가 아니므로”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는 ‘파고다 극장을 지나며’라는 시에서 “어느 뛰어난 시인은 아까운 나이에 영영 몸을 떠났고”라는 구절을 통해 기형도를 불러낸다. 그러면서 다짐한다. “난 아직도 그 거미줄 같은 껌줄기에/붙잡혀 있다 어차피 이것이 생의 몫이라면/완강히 버텨보리라, 난 천재가 아니므로”라면서. 80년대 자신의 내면과 엄혹한 시대 사이에서 갈등하며 절망을 고백하고 희망을 찾으려 했던 시인 기형도가 지금도 읽히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천재가 아닌 우리들은 오늘도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삶과 사랑을 노래하고 절망하며, 거미줄과 껌같이 주어진 삶의 몫을 완강히 버티는 것 말이다.

 

MeCONOMY magazine April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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