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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율곡 『성학집요』로 본 수양 정신

한국 정신문화를 찾아서(5)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 논설주간> 한국의 전통 예술품 중에서 조선 선비의 초상화는 도덕적 인간의 수양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그중에서도 조선 선비의 다양한 표상이 나타난 것으로 강세황, 윤두서, 김시습의 초상화를 꼽는다. 모름지기 초상화란 그 사람의 외모를 잘 묘사함과 동시에 인품과 삶의 궤적이 녹아나 있어야 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점에서 조선 시대 초상화는 세계 회화사에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조선 선비들의 수양정신을 눈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기 이를 데 없다.

 

 

조선 선비는 도덕 윤리적 삶을 실천하며 관직으로 나아가서는 왕과 백성을 위해 충성하고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도(道)를 추구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와 같은 수양을 정진함으로써 절제와 탈속, 품격의 경지를 스스로 드러냈다. 강세황과 윤두서, 김시습의 초상화를 보기만 해도 그들의 수양 정신을 그대로 알 수 있다. 율곡 이이가 선조에게 「성학집요」를 지어 올리면서 붙인 글을 보면 조선 선비의 정신세계와 삶의 목표를 오롯이 알 수 있다. 아래 글은 고산이 역해한 「성학집요/격몽요결」(동서 문화사)에서 인용했다.

 

“제왕의 학문 본말과 정치의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 명덕의 실효와 신민의 실이 대략 그 내용(성학집요) 안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세한 점을 미루어 대체를 알고, 어떤 것을 토대로 또 다른 것을 밝힌다면 천하의 도가 실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책은 신이 쓴 글이 아닙니다. 성현들이 쓴 글입니다. 신의 식견이 낮아 편집의 순서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만, 다만 한 구절이 모두 약과 같아서 우리 몸에 절실한 교훈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정자의 말씀에 ‘학문은 깊 지 않지만 말이 훌륭한 사람이 있을 때, 그의 말을 좇아 나아가면 도에 들 수 있다’ 했듯이, 설령 이 글이 부족한 신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좋은 말까지 버려서는 안 될 것 입니다.”

 

이 짧은 글 속에서도 율곡이 학문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학문에서 얻은 바를 기초 삼아 전거가 없는 새로운 실제 상황을 다루는 원리를 말하고 있다. 아울러 성현들을 드높이고 자기를 낮추면서도 본지를 밝히는 글 솜씨는 탄성을 절로 자아내게 한다. 오늘날 대통령 앞에서 쓴소리 한 마디 못하고 머리 조아리기에 여념 없는 고관들에 비해 얼마나 기개 넘치는 글인가.

 

 

“생각건대, 제왕의 학문은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절실한 일이며, 제왕의 정치는 성의를 다해 현자를 등용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이때 기질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자신의 병통을 살펴 처방하는 일이 중요하며, 한편 성의를 다해 현자를 등용하는 데에는 임금과 신하 사이를 없애는 것이 근본입니다. 엎드려 살피건대, 전하께서는 총명예지가 범상함을 훨씬 넘으시고, 효도와 우애, 공손함과 검소함을 천성적으로 행하시며, 호색하는 마음이나 이욕심(利慾心)을 근본적으로 끊어 버리시니, 지난 역사 속에서는 전하에 비견할 만한 임금이 드뭅니다. 다만 전하께서는 재기가 너무 드러나 선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지 못하시고, 또 노여움을 쉽게 발하시어 남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심을 버리지 못하시는 병통이 있으십니다. 만약 이러한 병통을 다스리지 못하시면 실로 도에 들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점 때문에 부드럽고 공손하게 말하는 이들은 전하에 의해 많이들 용납되고, 반면에 직언을 하며 전하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들은 꼭 전하와 멀어 지고 맙니다. 이것은 자기를 낮추어 남을 따르는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제왕’을 오늘날 대통령에서부터 조직의 간부, 작은 자영업 사장에 이르기까지 지도자로 바꾸어 놓아도 될듯하다. 아래 있을 때는 좋은 사람이라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표변하는 경우가 적잖이 있다. 아랫사람으로 있을 때는 미처 드러나지 않았던 기질적 병통이 윗자리에 올라서서 드러나 조직에 해를 끼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이 글은 홍문관 부제학때 올린 것으로 정삼품 당상관이 감히 왕의 기질적 흠결을 서슴없이 밝히고 고칠 것을 간청했다. 율곡은 이 병통의 구체적 예를 적시하기까지 했다.

 

“(전하께서는) 나랏일이 날로 기울어짐에 개혁의 뜻을 가지시다가도 누가 전하의 보수성을 지적하기만 하면, 전하는 곧 더욱 완고하게 보수의 뜻을 보이십니다. 무릇 전하의 발언이나 처사가 이런 식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아랫사람들이 전하의 진심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긴 하지만, 또한 전하의 도량이 넓지 못하고 사심을 극복하지 못한 데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뜻을 세움이 독실하지 못하시고, 선을 받아들임이 넓지 못하십니까? 신하들이 전하의 잘못을 바로잡아 전하를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고자 하면 전하는 꼭 ‘서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의심하십니다. 또 전하께 선한 말을 아뢰고 이상적인 일을 하시도록 권면해서 전하를 요순의 도로써 이끌어 가려 하면 전하는 꼭 ‘감당 하기 어렵다’ 하시며 물러서 버리십니다. 전하는 한가한 가운데 홀로 계실 때에 어떤 책을 즐겨 읽으시며 어떤 일에 힘쓰 시는가요? 뛰어난 자질을 길러 발휘하지 못하시고 깊은 병을 치료하지 못하신다면, 그것은 비단 신하들의 아픔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하늘에 계신 선조들의 근심이 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큰 뜻을 먼저 세우시고 반드시 성현들을 모범으로 하시어 이상 사회에 목표를 두십시오. 이를 위해 독서에 전념하고 정밀히 하실 것이며, 사물에 나아가서는 그 이치를 연구하시길 바랍니다.”

 

이 글이 함축하는 바는 제왕이나 군자, 오늘날 지도자라 함은 뜻을 세우는데 태만하지 말며 선을 솔선하라는 뜻이다. 또 한가할 때는 독서에 열중하고 자질을 함양하라는 것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대신들 중 성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을 팔다리처럼 여기시어 그들이 행하는 말이나 계책을 들으시고 끝까지 의심하지 마십시오. 또한 학문이 깊고 행실이 훌륭한 사람들을 선택하시어 전하의 좌우에 두시고, 그들로 해금 수시로 출입해 전하를 모시면서 성심을 다해 전하를 깨우치어 이끌게끔 하십시오. 이렇듯 선비들이 모두 나서서 전하를 도우려는 뜻을 갖게 해야 합니다. 나아가 초야에 묻혀 있는 현자들도 정성을 다해 부르시어 그들의 재능에 따라 관직에 임명, 유용한 곳에 배치하십시오. 전하의 부름에 끝내 응하지 않는 이에게도 마찬가지로 포상과 장려를 더하시어 그들의 높은 절개를 이루어 주십시오."

 

"전하 스스로 때의 알맞은 사정을 살피시고 역량을 헤아리실 때, 세상의 타락된 도를 갑자기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조정에 항상 청론이 그치지 않게 해 선을 좋아하는 성실성을 다하신다면 잡 된 무리들이 어찌 감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사론을 펴면서 선왕의 도를 노골적으로 배격하는 자가 있거나 혹은 겉으로만 달라졌을 뿐 보이지 않게는 선치의 형세를 저해해 그 행적이 덮어 둘 수 없을 만큼 드러난 자가 있을 때에는 또한 마땅히 추방하고 유배를 보내어 악을 미워하는 성의를 다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해 반드시 현자로 해금 진출하게 하고 사악한 자로 해금 자취를 감추게 해, 위로는 전하의 이목을 가라지 않게 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의 의심을 없애야만 군신 서로 간에 속마음을 밝게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나라의 모든 백성들도 또한 전하의 사심 없는 마음보기를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태양을 우러러 보듯 하며, 군자들은 마음속에서 자기들의 성의와 재주를 다할 것이요, 소인들은 두려움 속에서 개과천선 할 것입니다.”

 

율곡의 「성학집요」에는 세상을 통치하고, 조직을 경영하는 묘수가 들어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에 충성하는 자 들만 쓰지 말고 두루 널리 현자를 거두어 쓰면 세상의 인재 들이 나서서 지도자를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사정이 있어서 부름을 받지 않는 현자에게도 포상을 베푸는 도량을 보여 백성들로 해금 지도자를 존경하고 진정으로 따를 수 있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삿된 도를 펼쳐서 그 해로움이 명백히 드러날 경우에는 반드시 징계하는 단호함을 보 일 것도 권하고 있다. 만일 이런 일을 행하지 않으면 소인들의 타락을 막을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오늘날 삿된 정치인과 선동적 지식인들이 기승을 부리고 소인들의 타락이 극에 다 다르고 있음을 목격하면서 율곡의 상소문은 지금도 살아 있는 깨우침을 준다.

 

 

율곡은 서문에서 학문을 하는 법도 서술했는데 오늘날 누구든지 배움의 길을 걸을 때 좌표로 삼아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학자는 마땅히 배움이 많아 학식이 풍부해야 할 것이요, 학 문의 폭이 좁아서는 안됩니다만, 다만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고 뜻 세움이 굳지 않은 터에 앎이 많음에만 먼저 힘쓴다 면, 마음과 사려가 함께 하지 못하고 취사선택에 정밀하지 못 해 지리멸렬의 상태에 빠져 참을 잃고 마는 병폐가 간혹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먼저 중요한 길을 찾아 확실히 문을 열어야만, 모든 방면으로 널리 배울 수 있고 앎을 증가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하물며 임금이란 정치의 중심으로서, 정사에 임하는 시간이 많고 책을 읽을 시간이 적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책의 요지를 뽑아 그 중심되는 가르침을 정립하지 않은 채 오직 배움에만 힘쓴다면, 외우기나 하고 좋은 글이나 짓는 폐단에 빠져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바루며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도에는 참된 얻음이 있지 않 습니다.”

 

방향을 정하지 않은 채 배움에만 열중하는 것이 오늘날의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폐단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도 성과가 변변치 않은 것은 다 이 때문임을 율곡은 지적하고 있다.

 

율곡의 「격몽요결」에서 나오는 구용 구사의 지침
 

「격몽요결」은 처음 유학에 입문하는 초학자를 위해 율곡 이 저술한 짧은 책이다. 인조는 격몽요결을 왕명으로 모든 향 교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기본 학습서로 배포했다. 여기서는 선비의 수양 정신을 알 수 있는 대목만 소개한다.

 

"항상 일찍 일어나고 밤에 잠을 자며, 옷과 갓을 반드시 바르게 하고 얼굴빛을 반드시 엄숙하게 하며, 손을 모으고 단정히 앉으며, 걸음걸이를 편하고 조용히 하며, 말을 조심하고 무겁게 해, 일거일동을 가볍게 해서는 안 된다.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것은 ‘구용(九容)’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고, 학문을 나아가게 하고 지혜를 더하는 것은 ‘구사(九 思)’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다. 이른바 ‘구용’이란, 발의 모양은 무겁고, 손의 모양은 공손하고, 눈의 모양은 단정하고, 입의 모양은 조용하고, 목소리의 모양은 고요하고, 머리 모양은 곧게 하고, 기운 모양은 엄숙하게 하고, 서있는 모양은 덕스럽게 하고, 얼굴빛은 씩씩하게 한다. 이른바 ‘구사’란, 보기는 밝게 하기를 생각하고, 듣기는 분명 하기를 생각하고, 얼굴빛은 온화하기를 생각하고, 태도는 공손하기를 생각하고, 말은 충성되기를 생각하고, 일에는 공경하기를 생각하고, 의심나면 묻기를 생각하고, 분하면 어려움을 생각하고, 얻는 것을 보면 의를 생각하는 것이다. 항상 구용과 구사를 마음에 간직하고 몸을 가다듬어, 잠시라도 방심하지 말며, 또 앉은 자리 옆에 써서 붙이고 때때로 보게 할 일이다.”

 

성학집요와 격몽요결의 수양정신이 과연 조선의 선비들이 제대로 실천했던가. 앞서 초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수양정신이 선비를 포함해 왕과 백성들에게 마음과 행동, 생활의 지침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표암 강세황의 일생을 살펴보자. 
 

표암 강세황의 선비로서 행장

 

1713년에 태어난 강세황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행서를 잘 썼다. 28세에 어머니 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강세황은 54세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글을 남겼다.

 

"큰 형님 이 참소를 입어 귀향 가는 것을 목도하고 세상길이 험한 것을 알고 과거 시험에 나가려는 생각을 버렸다. 오직 옛글에 전념해 암송한 것이 많았다. 마음을 가라앉혀 생각한지 수십년에 식견과 이해가 점차 통달되어서 깊은 조예와 홀로 얻은 견해가 있었다.(어머니 시묘살이 후) 안산군에 터를 잡아 낡은 집 열아홉 칸을 지으니 쓸쓸했다. 생계에 관한 일은 전혀 묻지를 않고 오직 문사와 붓과 벼루를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또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하며 때로 붓을 놀리면 질펀하고 우아해 속기를 벗어나기도 했다. 묵란이나 묵죽 그림은 맑고도 굳세어 세속의 기운을 끊은 듯 했으나 세상에 깊이 아는 자가 없고, 스스로도 잘하는 일이라 여기지 않아 다만 흥을 품고 마음에 맞는 것을 펼쳐낼 뿐이었다. 혹 남이 구하면 속으로는 싫고 괴롭지만 매정하게 물리치지 못했다. 전서와 예서에서도 예스러운 뜻을 터득했다. 흥이 일면 옛날 서법 여러줄을 임서함으로써 조용하고 한가하면서도 맑고 원대한 뜻 을 거기에 담았다.”

 

“성품이 조용하고 담박한 탓에 세속을 초월해 삼베옷과 거 친 밥에도 편안히 여기며 일찍이 가난함과 군색함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마음이 어질고 관대해 대체로 남의 근심을 근심하고  남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것에 뜻을 두었다. 옹(강세황 자신을 가리킴)은 체구가 작고 모습도 보잘것없어 갑자기 만나는 자는 옹의 마음속에 독특한 식견과 오묘한 견해가 있음을 알지 못해 모욕하는 자가 있어도 웃어넘겼다. 바둑의 흑백을 손으로 잡지 않았고 잡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점쟁이와 더불어 운명을 말하거나 관상법에 대해 이야기 한 일도 없었다. 풍수쟁이의 말은 더욱 믿지 않았다. 병자년 에 아내가 죽었으나 풍수가를 불러 땅을 살피지 않고 한적한 땅에 자리를 잡아 무덤을 썼다. 아들 넷을 두었으나 모두 대 략 문자만 이해시켰을 뿐 다른 가르침을 준 적은 없고 오직 집에서 대대로 내려오듯 효도하고 우애해 선대의 가르침을 욕보이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강세황은 61세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70세에 제자인 김홍도와 함께 호랑이 그림을 함께 그렸다. 72세에 청 건륭 제의 천수연에 참석하러 부사로 북경을 가청의 문인들과 교 유했다. 표암은 79세에 붓을 달라 청하고 창송불로 학록제 명(蒼松不老 , 푸른 소나무는 늙지 않고 학과 사슴이 일제히 우는구나)라는 8자를 쓰고는 세상을 떠났다. 위의 글은 「표 암 강세황 산문전집」(박동욱·서신혜 역주, 소명출판)에서 추 려 썼다.
 

전통의 좋은 가르침 살려내야

 

조선시대 사람들은 위에서 보았듯이 포괄적으로나 구체적으로나 마음과 행동, 생활의 지침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런 마음을 가다듬고 실천을 생활화하는 지침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다 위나 아래, 옆으로나 욕망의 분출이 지천으로 보이는 듯하다. 종교생활을 하면 종교에서 주는 계율에서 마음과 행동, 생활의 지침을 얻을 수 있을 법하나, 현대 종교가 세속화에 물들면서 계율적 삶을 실천하는 신앙인을 요즘엔 보기 드문 듯하다. 여기에다 서구 선진국의 타락된 모습이 마치 패션 옷 유행하듯이 물밀 듯이 들어와 사람들의 정신과 행동을 시시각각으로 타락시키는 것 같다. 오늘날 현대학문이라는 심리학, 사회학, 정신의학들은 조선시대의 수양 정신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일탈 행위와 이상 심리를 친절하게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전락한 듯하다. 서구 선진국의 타락된 모습을 걸러내고 전통의 좋은 가르침을 살려내는 것이 오늘날 한국인들의 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MeCONOMY magazine March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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