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는 로마의 쇠망원인을 다룬 명저로 꼽힌다. 역사에서 우리가 얻는 가장 큰 교훈은 번영의 원인보다는 패망에 이르게 된 근본원인을 아는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조선왕조의 멸망원인을 다방면에서 짚어보는 작업은 우리에게는 무척 소중하고 시급하기조차 하다. 그간의 저술은 조선왕조의 멸망원인을 주로 일본 등 외세의 침략과 쇄국정책 등에서 찾았는데 작년에 조선의 정치사상과 경제 및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분석한 『조선왕조의 빈곤정책』이 나왔다. 광준 일본불교대학 교수가 쓴 『조선왕조의 빈곤정책』은 조선왕조는 왜 시장을 철저하게 억제하고 대외무역을 차단하다시피 해 가난한 나라가 되고 말았는지, 거의 모든 백성들이 나중에는 굶주리게 되고 왕조도 결국 구빈정책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이해하고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저자는 주장의 논거를 교조적 성리학사상의 존재와 개인의 빈곤 책임을 인정하는 법가 사상의 부재, 농민들에게 종자를 빌려주고 추수 후에 상환받는 환곡제도와 창 제도의 실패 등에서 찾았다. 기자는 이 책을 읽고 책에 나오는 내용 중에 의문이 드는 점, 나아가 저술 내용에 없으나 조선왕조의 정신문화와 경제사회 의식에 대해 추가적인 질문을 덧붙여 이메일 인터뷰를 했다. 답변 내용은 조선 왕조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상과 사람들의 의식을 진단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두 번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박광준 교수는 중국은 법가와 유교 사상이 공존했으며 대 의를 중시하는 북방문화(羊문화)와 경제를 중시하는 남방문화(貝문화)가 서로 배척하지 않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데 반해 조선은 오로지 유교 사상만이 존재했다고 말했다. 일본에도 시대는 법가적 사상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제도 면에 서도 시장주의적 방식으로 운영됐다고 말했다.
Q. 우리나라에 유교가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부터인 것 같은데 법가사상이 전혀 전해지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중국과 접해 있는 조선에도 전하지 않은 법가사상이 바다 건너 일본에 전해졌다는데 어떤 경로로 법가사상이 일본에 뿌리내렸는지요?
박광준 교수 법가사상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사상과 유사합니다. 인간행동의 인센티브, 그리고 경쟁체제를 매우 중시하고 그것을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간주합니다. 나라는 흥 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나라를 망하지 않게 하려면 법치사회가 필요하다고 설합니다. 법치사회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그 보상(상)을 받는다는 믿음, 그리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믿음, 즉 ‘신상필벌’에 대한 믿음이 퍼져 있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빈민에 대한 국가의 직접구제를 확대하는 것은, 아무 공적이 없는 사람에게 상을 내리는 것과 같은 행위이며 사람들의 노동의욕을 감퇴시켜서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개인책임주의, 자조(self-help)의 사상이므로 말하자면 ‘작은 정부(minimum government)’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법가사상가라고 하면 상앙, 한비(자), 관중 등이며 그들 의 저술이 곧 법가사상서입니다.
그러나 법가사상을 접하거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법가적 사회’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법가적 사회는 노동윤리가 강조되고 개인의 재산권이 보장되며, 개인간의 계약이 일반화된 사회에 친화적이므로 그러한 사회는 법가적인 사회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유교와 법가는 공통점도 있지만 매우 대조적인 사상입니다.
예를 들어 노부모 모시기와 가족의 역할이라는 주제라면 두 개의 사상에 큰 차이가 없고 모두 가족의 책임과 역할을 강 조합니다. 그러나 빈민을 어떻게 처우해야 하는가, 혹은 국가는 백성의 경제사회활동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되면 두 개의 사상은 완전히 정반대의 입장을 취합니다. 조선의 통치이념을 제공한 조선주자학(성리학)은 말하자면 백성의 경제사회생활에 대한 개입주의를 지향하므로 기본적으로 ‘큰 정부’의 사상입니다. 주자학을 교조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은 극단적인 큰 정부, 철저한 국영체제를 유지했다는 뜻이 됩니다.
조선왕조에서는 범법행위를 관대하게 처벌하는 것이 마치 유교의 인정(仁政)으로 여기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법가사상은 배척받았습니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볼때 기본적으로 경쟁사회였습니다. 16세기말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할 때까지는 지역 간의 전쟁이 계속됐고, 통일 후 시작된 에도 시대(江戶時代. 16031868)는 수백개의 번(藩)으로 이루어진 경쟁체제였습니다. 모든 번이 쇼군의 권력에 복속돼 있었지만, 각각의 번은 세습제로 통치되는, 하나의 나라였습니다.
도요토미는 통일후 병농 분리정책을 시행해 무사계급을 최상위에 두는 신분제도를 시행하고 백성의 재산권(농지경작권)을 보장하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경작자에게는 세금(연공미)의 납부를 엄격하게 의무 지웠습니다. 또한 기본적으로는 경제활동의 기본인 계약사회를 확립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책임주의의 사회를 연 것으로, 법가적인 사회가 된 것입니다.
중국과의 교류도 주로 뱃길을 이용한 남부지역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경제생활을 중시하는 남방문화인 패(貝)문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남방문화는 법가적인 사회에 친화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에도 시대에는 주자학이나 양명학이 도입됐지만, 법가사상서인 『한비자』의 영향이 매우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에도 시대에 유교가 도입돼 큰 영향을 받았다는 논의가 일본 내에 있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에도 일본은 매우 법가적인 사회였습니다.
법가 사상의 영향을 직접 받음으로써 그러한 사회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사회가 발달해 법가적인 사회가 일찍이 형성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한비자』와 같은 책이 흥미롭게 받아들여졌다고 생각됩니다. 에도시대에 는 흉작으로 연공미를 납부하지 못하면, 자식을 팔아서라도 세금을 납부해야 할 정도로 법이 엄격하게 집행됐으므로, 만약 조선의 사대부가 당시의 일본을 봤다면 ‘오로지 법만 알고 인정사정이 없는 사회’로 비춰졌을 것입니다.
지금도 일본의 노동윤리는 매우 강해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를 능가한다고 일컬어지고 있고, 자기책임주의적 경향은 한국에 비해 월등히 강합니다. 일전에 일본의 저널리스트가 한국에 가서 편의점의 아르바이트 대학생이 근무 중에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놀라운 일이라고 기고했습니다. 일본의 노동현장에서는 보기 어려운 매우 진귀한 풍경으로 비쳤던 것이겠지요.
Q. 조선왕조에서 오로지 주자성리학만이 맹목적으로 숭앙됐다는 것은 조선의 왕과 사대부 지배층의 정신문화와 지식수용의 태도가 너무 편향적이고 경직성이 현저한 것 아닌가 생각되는데,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요?
박광준 교수 조선주자학은 주자학본래의 모습과는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주자(주희)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부터 잘못돼 있었습니다. 주자학의 본질과 그 배경에 대해 조선은 잘못이해하고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흔히 거의 모든 나라에서 현재의 사회문화가 15·16세기에 형성됐다고 일컬어집니다. 오늘날 한국의 사회문화는 매우 교조주의적입니다. 유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불교에 있어서도 교조주의적이지요.
교조주의적이라는 것은 주체성의 결핍, 곧 사대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회문화는 적어도 이미 조선 초기에는 형성돼 있었고, 그 이전 고려시대에도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문신이 무신을 극단적으로 차별하는 풍토에서 촉발된 ‘무신의 난’을 통해 그러한 풍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섣불리 짐작하기가 어렵지만, 몽고의 지배체제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봅니다.
이민족의 지배는 사회를 분열시키고 그것이 교조주 의적풍토를 심화시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송나라 주자학은 신분질서 붕괴와 시장경제 발달을 배경으로 성립한 것이었고, 주자 자신도 경제생활과 농민의 노동윤리를 매우 중시했다는 점에서 매우 송나라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주자는 중국 남부의 복건성 사람으로 소위 패(貝)문화의 인물, 즉 이데올로기보다는 경제생활을 중시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사상을 보면, 백성을 보호하는 국가의 책무를 강조했지만, 다른 한편, 국가로부터 받은 도움은 반드시 갚는다고 하는 농민의 윤리의식을 강조했습니다. 농민을 어여삐 여겨 보살펴야 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을 개선해 가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은 화폐경제가 미발달한 상태에서 그저 책으로 만 주자학을 이해하고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성역화한 형태로 도입한 것입니다.
조선이 주자학을 받아들일 때 중국 (명)에서는 이미 주자학을 대신해 양명학이 유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양명학은 인간의 동기를 중시해 상업 발달의 원동력이 된 유학의 한 분파입니다. 에도시대 일본의 한 유학자가 기독교 성서를 읽고서는 ‘이것은 양명학이다’ 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양명학은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에 친화적입니다.
일본의 초기 크리스천 중 유학자출신이 많았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선사대부는 오직 주자학만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실학자 홍대용은 조선의 문제는 주자학을 받아들였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자학만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자학 지상주의 풍토는 ‘주자학 이외의 사상에 대한 사상탄압’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한번 지배세력으로 자리를 굳힌 인간들이 그 지위를 영구히 누리려는 의도로 극단적인 사상적 배타성을 드러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선주자학은 자연과학의 발달을 억제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주자학이 받아들여졌지만, 곧 개인의 교양서와 같이 취급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배경에는 과학의 보급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18세기가 되면 지동설이 일반화되는데, 천동설을 근간하는 주자학의 가르침 을 절대시하지 않고 개인 수양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Q. 조선왕조의 구빈제도인 의창(환곡제) 시스템이 파탄 지경에 이르러 숙종 때 관찰사를 지낸 바 있던 이단하가 자치적 성격의 ‘사창’을 도입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당시에 숙종이 이 제도의 도입을 윤허했음에도 다수의 조정 신하들이 반대해 시행되지 못했는데요, 조선왕조의 사대부들은 ‘개혁’이란 걸 거의 하지 않고 현실론을 이유로 현상유지, 또는 약간의 개선으로만 일관하 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왕조 전체를 조망해보면 왕 들 중에는 개혁적인 군주가 더러 있었던 것 같은데, 사대부들이 사사건건 반대해 개혁이 좌절된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조선왕조의 사대부 역할을 왕을 견제해 온 집단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듯한데, 교수님은 조선사대 부들의 역할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요?
박광준 교수 흔히 조선의 지배체제의 역할을 국왕과 양반층이라는 이분법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양자는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역사학자 커밍스, 그리고 이미 조선시대 당시의 저술가들도 지적하 듯이 조선은 ‘약한 국가에 강한 지배층’이라고 특징지어집니다. 국왕에 따라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국왕이 양반층을 완전히 제압한 시절이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양반층의 본질을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조망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조선의 사대부는 동아시아에서 매우 독특한 성격의 지배계급이었다는 것, 즉 중국이나 일본의 사대부와는 다른 매우 특별한 신분이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양반층이라고 해서 그들을 하나의 동질집단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양반층 내부에도 적어도 두 종류의 양반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조선사대부는 토지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고 어느 지역에서나 거주할 수 있었으며, 공직에 취임하지 않은 경우라도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국왕이 양반층을 압도 하지 못했던 가장 큰 원인은 조선의 양반층이 국가의 봉록을 받지 않더라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경제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중국이나 일본의 지배층에서는 보이지 않는 조선 특유의 사정입니다. 에도일본의 경우, 무사계급(士)은 기본적으로 농촌에 살 수 없었고 원칙적으로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사계급이 영주로부터의 급료를 받지 못하면 곧바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충(忠)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중국의 독서인(讀書人) 혹은 만다린이라고 불리던 사대부계급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지와 노비를 거느린 조선의 재지사족은 벼슬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고 그만큼 그들에 대한 국왕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했습니다.
사회개혁이란 기득권의 제한내지 포기가 그 전제 입니다.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양반층은, 사회의 본질적 개혁에는 반대세력이었기 때문에 개혁은 늘 미뤄지게 됐던 것입 니다. 그렇지만 양반층 중에는 사회개혁을 주창하고 실천하려는 또 하나의 양반층이 있었습니다. 양반층이라고 해서 모두가 대지주였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경제적 토대에 따라 사회개혁에 대한 입장이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대동법 시행의 산파역이었던 김육(金堉, 1580~1658)은 말하자면 경제기반을가지지 못한 인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연마와 후학양성에 진력한 이황의 가문은 방대한 토지와 더불어 수백명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후 명나라는 조선이 양명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영남학파의 반대로 무산됐던 사실은 따지고 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습니다. 방대한 토지와 많은 노비를 거느린 당사자가 스스로 신분제 해체를 추진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실학자들은 재야인사로서 정책결정에는 영향을 미치기 어려 운 상황이었고 대부분 경제적 기반을 가지지 못했는데, 거꾸로 생각하면 경제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개혁적 성향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단하의 개혁정책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그를 앞으로 주목해서 연구해야 할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몸소 보여준 인물입 니다.
중국이 1978년 개혁개방을 시행하면서 덩샤오핑은 실사구시를 정책이념으로 제시했는데, 실사구시란 ‘진리를 검 증하는 유일한 수단은 실천이다’라는 개념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실사구시란 실제로 정책을 시행해 보고 효과를 본 정책만을 본격적으로 시행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 실학자들 중에는 실사구시의 본뜻이 정확히 이해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학자로서 이단하가 높이 평가되는 점은 자신이 지방관으로 일할 때 사창을 시행해 그 효과가 입증됐기 때문에 그 정책경험을 바탕으로 사창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의 제안은 당장이라도 시행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인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 이단하는 사창의 실현을 위해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필요한 경우 사재를 털기도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사창은, 빈곤구제 수준에 그치지 않고 국가재정을 장기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시책이었습니다. 나라의 전반적 상황 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진 분이었는데, 열매 거두지 못 한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Q.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절대이념으로 신봉하고 그 이념에 따라 무리하게 실행하려고 한 일종의 신정국가체제와 유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왕조에는 정치행정의 전문관 료집단은 존재하지 않았습니까? 일본의 막부체제는 전문관료 집단이 있었는지요?
박광준 교수 질문대로, 조선은 말하자면 신정국가체제였습 니다. 흔히 조선의 지배체제는 이슬람의 칼리프체제와 비견 된다고 하지요. 종교지도자가 국가의 최고권력자가 되는 체 제입니다. 조선에서는 주자학 권위자가 곧 정치권력자였습니 다.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지적도 있지만 국가의 중요행사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했고 그 행사의 주관자가 국왕이었으며 또 지배층이었던 것입니다. 조선의 공식 관직은 매우 한정돼 있었습니다.
중앙관직 총수가 4,000개 정도였고, 지방관직이 1,000개 정도였으므로 극히 적었습니다. 공식관직은 국가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 명시돼 있었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나는 사회변화에 대응해 유연하게 늘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하나는 각 관청은 엄청난 수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어 그들을 부림으로써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 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방에서는 공식적인 임금을 받지 않고 일하는 많은 수의 하급관리들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생활은 환곡의 이자 등으로 지탱됐기 때문에 결국은 백성의 부담이었습니다. 비공식적 관직의 수는 매우 큰 규모였습니다. 이러한 체제는 전문적인 관료제 발전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래서 큰 일이 생기면 그에 대처하기 위해서 임시기구를 만들어 운영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전문성이 발휘되기가 어려웠습니다.
조선왕조의 가장 중요한 사업의 하나였던 진휼사업 (구빈사업), 그것을 관장하는 진휼청도 임시기구였습니다. 진휼업무조차도 진문성이 심화되지 못했다는 지적은 당시 조선사회를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관찰했던 유수원도 『우서』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기근의 피해상황도 객관적으로 조사되지 못하고 불공정한 일처리가 만성화됐 던 것입니다. 조선왕조는 필요에 따라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거나 관직 수를 늘리는 등 현실에 맞도록 법과 제도를 개정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체제는 사대부계급을 견제할 수 있는 계급, 예를 들면 상인계급의 존재가 미약했습니다. 실사구시를 주장했 던 실학자들 사이에서조차 개혁논의가 매우 교조주의적 경 향을 띠고 있었습니다. 실학자의 대부분은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그 개혁방안으로서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 다’는 식의 해법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이념을 도입해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인상했고, 그로 인해 경제부문에 좋지 않은 영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한국사회에 여전히 교조주의적 정책결정 풍토가 강하게 남아 있다는 산 증거라는 측면에서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그러한 우리의 현실을 깊이 고려하지 않은 정책결정입니다. 정책의 결과가 좋지 않았기에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이념에 현실을 끼어 맞추고자 하는 태도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에도일본은 200개 이상의 번으로 구성돼 있었고 무사(사무라이)계급은 봉급생활자였습니다. 각자의 직무가 비교적 전문적으로 분화돼 있었지요. 경호, 경리, 요리 등등으로요. 무사계급은 농촌 거주가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농촌지역의 관료는 농민이었습니다. 농민 관료가 농민들의 이해를 조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상인계급의 영향력이 매우 컸습니다. 조선이 중국문화 중에서 압도적으로 양(羊)문화 (이데올로기적 문화)의 영향을 받았던데에 반해 일본은 패 (貝)문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에도 시대의 지배층 은 국민의 경제생활에 영향을 주는 정책을 함부로 시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에도일본에서도 크고 작은 기근이 많이 발생했는데, 기근이 발생하면 금주령을 내렸습니다. 그 점은 조선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시행방법은 달랐습니다. 주조금지령이 시행되면 모든 관리들이 술 공장에 가서 재고조사를 하고, 남아 있는 술을 모두 판매한 후에 술 제조를 금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상인계급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2020년 신년호에 계속)
MeCONOMY magazine December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