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대전 유성에 사는 박종호 선생이 소유하고 있다가 2000년 무렵에 사단법인 한배달에 전해지면서 반재원 씨 등 여러 사람들이 복사본으로 만들어 보관해왔다.
반재원 씨는 고대사의 자료가 될 수 있는 이 책이 누군가에 의해 번역돼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아 본인이 직접 번역에 나서서 이번에 햇빛을 보게 되었다.
반재원 씨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1. 단군의 어머니 이름이 웅녀가 아니라 열유 씨의 딸 교웅(轎熊)이라고 밝히고 있다.
2. 단군의 고향과 성장지는 중국 연길시이다. 단군이 국자(國子)(지금의 세자)로 책봉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거리를 국자가라 하였고 도문을 설치한 것도 국자 책봉을 기념하기 위한 상징물이다.
3. 단군 왕검의 아내 이름이 처음으로 나온다. 하백의 딸 태원(太源)이라고 밝히고 있다.
4. 박혁거세의 외할아버지가 해모수로 기록되어 있다.
어머니의 이름은 해모수의 딸 ‘파소’로 나온다.
5. 박혁거세의 아버지 이름은 태백산 주 박원달(朴元達)로 기록되어 있다.
7. 수로왕의 아버지 이름이 ‘이비아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밖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왕검의 조부인 제12세 태제 한[환]인은 재위 77년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고 도량이 크며, 가옥을 축조하고 성곽을 수축하며 의복을 정제하니 국내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안도하며 생업을 즐겼다.
● 갑오 3년: 건축관 노원에게 명하여 제방을 축조하고 요하의 물을 끌어 가뭄의 해를 제거하였다.
● 기해 8년: 만보산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하였다.
● 을사 14년: 흉년이 들어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 무신 17년: 하동백 영윤이 금, 은, 모피 등의 물건을 헌납하였다.
● 기유 18년: 각태에게 명하여 안산에 목마장을 설치하였다.
● 정사 26년: 유구 씨가 와서 비단, 주옥 등의 물품을 헌납하였다.
● 무오 27년: 무룡 씨가 쇠 녹이는 용광로를 시설하고 옥을 새겨 예술품을 만들었다.
● 기미 28년: 이명에게 명하여 역법을 제조하였다.
● 임술 31년: 악사 우성에게 명하여 종, 석경, 비파 등의 악기를 제조하여 음률을 조절하였다.
● 갑자 33년: 욱호 씨가 피혁, 모직, 면직 등의 직물을 제조하였다.
● 정묘 36년: 유호 씨가 와서 금, 은, 주옥 등의 물품을 헌납하였다.
● 정축 46년: 갈문 씨가 와서 모시, 삼베, 비단 등의 물품을 헌납하였다.
● 계미 52년: 감성관 간백에게 명하여 역사책을 지었다. 제13세 홍제 한[환]웅 재위 79년, 황제의 품성은 영민하고 크고 위대하며 선조의 뜻을 공경하여 받들고 백성을 널리 구제하며 덕과 은혜를 베풀어 곤궁한 자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겼다.
● 경술 2년: 열유 씨의 딸 교웅을 황후로 삼았다.
● 갑인 6년: 진방에게 명하여 ‘안주학사’를 설치하고 영재를 교육시켰다.
● 갑자 16년: ‘단목사’를 건설하고 국호를 진단이라고 하며 단향나무를 심어 수풀을 조성하고 ‘단림’이라 하였다.
● 정묘 19년: 완달산에 제단을 축조하여 하늘에 제사지냈다.
● 경진 32년: 의복과 혼인절차를 정하였다.
● 임오 34년: 농관 교성에게 명하여 농기구를 제조하여 농사 짓는 법을 가르쳤다.
● 정해 39년: 감성관 팽기에게 명하여 하늘의 운행을 관측하였다.
● 경인 42년: 연강에 욕장을 설치하여 놀고 즐기는 장소로 삼았다.
● 임진 44년: 주사인 진광을 도수로 보내어 배로 건너는 뱃길을 개통하였다.
● 병신 48년: 건축관 석원에게 명하여 천평 산성을 축조하고 궁실을 지었다.
● 정유 49년: 황후 교웅이 신단 별궁으로 유람하러 나갔다.
● 갑진 56년: 학관을 설치하여 예절, 음악, 활쏘기, 말타기 등을 가르쳤다.
● 경신 72년: 제요의 군대가 침입하여 오니 장군 찰관능원을 보내어 항거하여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후비 및 공주(왕검의 누이)는 사평가로 피하여 가니 (이곳이) 공주령이 되었다. 장군 이봉을 보내어 5만 군대를 이끌고 항거하여 싸웠으나 패주하였다. 이때 태자(왕검)는 요하를 건너 대고산으로 들어가니 (이곳을) 태자 ‘하’라 칭하게 되었다.
● 병인 78년: 군과 민이 태자(왕검)을 옹호하여 도문을 설치하고 국자가라고 칭하였다.
● 정묘 79년: 황제(한웅)가 근심하고 분하여 병이 일어나 죽고 태자 왕검이 즉위하니 이분이 홍성제 일명 단제이다.
제1세 홍성제 일명 단제 한왕검 재위 93년
한왕검(한검-왕검 단군)은 신성 총명하고 관인 자애하며 덕과 은혜를 베풀며 중생을 널리 구제하고 ‘천부경’을 설파하니 강연을 듣는 자가 시장처럼 운집하였다. 홍성제 단군왕검은 중고제왕으로 시작된다.
● 무진 (당요 25년): 10월 3일에 나라 사람들이 (한왕검을) 추대하여 (단제)임금을 삼고 국호를 ‘진단’이라 하고 ‘삼일신고’와 366조의 율령을 포고하며 교화하여 평화롭게 살았다. 선제의 사당에서 제사 지내고 비서갑 하백의 딸 태원을 황비로 삼았다.
● 경오 3년: 요심땅을 정비하여 경계를 정하니 경계가 갈석산에 이르고 황하에 접하여 한계가 정해졌다. 지지에 이르기를 동으로 해역에 이르고 북으로는 비해에 한정되고 남으로는 영주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 신미 4년: 천부경을 제정하여 ‘경천교’를 창립하였다.
● 경인 23년: 이기의 침공을 피하여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아침 해가 신선하고 밝음을 들어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 계사 26년: 교화가 사방으로 젖어들어 동으로는 대해에 이르고 남으로는 열수에 이르고 서로는 난하에 이르고 북으로는 흑수에 이르니 동서가 오천리요 서북이 6천여리였다.
● 계축 46년: 참성대를 만들었다.
● 갑인 47년: 황제가 마니산에 올라가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였다.
● 을묘 48년: 세 아들을 마니산에 보내어 갑비차에 성을 축조하여 ‘삼랑성’이라 하였다.
● 갑오 87년: 교화가 잘 스며들고 구비되어 백성이 안정되게 살고 생업을 즐기니 집집마다 양식이 남아돌고 산에는 도적이 없으며 밤에도 대문을 걸지 않았다.
『홍사한은』에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천부경과는 8~9자가 다른 천부경도 전한다.
번역자인 반재원 씨는 이 책의 주를 다는 데만 2년 가까이 걸렸으나 앎이 부족하여 한계점에 있었다고 말하며 후인들의 보강을 바란다고 밝혔다.
반재원 씨는 한글과 태극 원리, 천문 연구에 정통한 학자로서 한배달 부회장이며,『한글 창제원리와 옛글자 살려쓰기』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