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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정보


70년대 아이디어가 오늘날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을까?

뉴욕타임스 서평 소개

 

 

케이크를 두 아이에게 가장 균등하게 나누려면? 

 

정의에 대해서만 40년을 파고들었던 미국 정치이론가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 다들 “원초 상태, original position”과 “차등의 원칙, difference principle” 같은 유명한 관념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내 경우엔 그렇지 않다. 그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머리에 떠오르는 건 먹는 케이크다. 먹는 케이크라고? 만약 여기에 케이크 하나가 있고 이 케이크를 두 어린이에게 똑같이 나눠줘야 한다고 치자. 어느 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가져가면 한 판 붙을 상황이다. 과연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두 아이가 조금도 불평 없이 케이크가 공정하게 분배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할 수 있을까?  

 

핵심은 이렇다. 두 어린이가 분배 과정에 개입하도록 하고 권력을 분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두 어린이가 칼을 다룰 만큼 충분한 나이라고 가정하고, 한 아이로 하여금 케이크를 자르게 하고, 다른 아이에겐 자른 케이크 조각을 먼저 고르게 하는 권력을 주면 된다는 말이다. 아마도 케이크를 자르는 일을 맡은 아이는 가능한 한 극도로 공평하게 자르려고 할 것이다. 

 

존 롤스는 케이크-자르기 시나리오 버전을 자신의 역사적인 1971년의 책 “A Theory of Justice”에 넣었다. 이 버전을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다니엘 챈들러(Daniel Chandler) 가 끄집어 내 새로운 시대에 맞게 부활시키고자 한다. “Free and Equal”에서 챈들러는 롤스의 접근법이란, “개인의 권리와 차이를 자유롭게 존중하는 것과 공정성에 대해 평등주의를 강조하는 것”이라면서 “그래야만 진정으로 변혁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는 증오와 불신을 극복할 수 있는가? 

 

지금 이 시대가 챈들러 책의 내용이 적용될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 될 수 있을지라도 역시 현실은 생각처럼 녹록치가 않다. 정치적 증오와 불신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시점이니까 말이다. 이런 시점에서 챈들러는 한편으로 느긋하게 안주하고 있는,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의 지배와 구분되는 자유주의를 위한 고무적인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고자 한다.  

 

롤스의 프로그램이 실제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판독하는 힘든 작업을 수행하는 그는, 우선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째서 자유주의에 대해 좌절감을 느끼게 했는지의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롤스의 이론은 개인들이 “무지(無知)의 베일” 뒤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디자인하고자 하는 “원초상태”의 사유 실험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부자로 태어날 것인지, 가난 하게 태어날 것인지, 동 성애자나 이성애자로 태 
어날 것인지, 흑인 혹은 백인으로 태어날 것인지 등등의 여부를 알 수 없었다. 

 

하여 케이크를 자르되 자른 조각을 먼저 선택할 수 없는 그 아이처럼, 사람들 각자는 가장 취약한 사람들조차 공평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사회를 실현하려는 동기가 부여된다. 이것이 바로 이기심이나 배타주의를 기반으로 하기보다는 호혜(互惠-서로 편익을 주고 받는 것)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주의다.  


롤스의 “차등의 원칙”에 따르면, 사회에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증진시키기만 한다면 불평등은 허용될 수 있다. 챈들러는 명쾌하고 우아한 작가다. 자신의 주장을 몰고 가는 진심 어린 열정의 감각이 있다-그래서 정치적 이슈를 통해 사유하는 롤스의 체계(뼈대)로는 가장 다루기 힘든 논쟁에서 벗어나 그가 인간적인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는 어떤 믿음이 생긴 듯하다. 


그는 “사람들이 많은 점에서 동의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전제하면서 “무지의 베일은 상호 간에 동의할 만한 출발점을 찾아내도록 우리를 고무하고 있다”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공동체에서 태어났는지를 모른다면, 우리는 당연히 합당한 다원주의를 원할 것이다. 또한, “시민으로서 우리의 자유와 평등의 근거가 되는 조건을 유지하는 국가” 를 원할 것이다.  

 

◇ 언론과 선전의 차이는 무엇인가 

 

챈들러는 언론의 자유라는 민감한 문제를 하나의 예로 들고 있다. “정치적이며,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언론은 무엇이 공평한 것이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발달시키는데 대단히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다”라고 그는 쓰고 있다. 그래서 언론은 강력한 보호를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선전’ 같은 행위를 언론으로 볼 때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좋은 삶을 살아가는가에 도움을 줌에 있어서 “전혀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게 아
니라서, 선전과 같은 언론은 제한을 둘 수 있다. 제한을 둔다는 의미는 개인의 자유와 단체의 자유가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도록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국가는 동성애자들이 차별 대우를 받지 않도록-그들 커플을 인정하라고 강요할 수 없을지라도-그들의 권리를 보호해야만 한다. 동성애자인 챈들러는, 모든 이들로부터 도덕성의 문제에 대해 동의받는다는 전제가 깔린 동성애자들의 권리는 에너지 낭비임을 시사한다. 

 

즉 “일부 사람들에게 이것-동성애의 성행위는 하나의 죄라는 믿음-은 그들이 가진 신념의 일부라서 그 어떠한 합리적인 주장도 그들을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설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의 책은 슬픈 생각과 느낌을 보여주는 공허한 추상적 영역이라고 격하한다면 챈들러는 그런 주장을 거부할 자격이 있다. 

 

“Free and Equal”의 마지막 3분의 2는 구체적인 정책 제안에 쓰이고 있다. 그런 제안의 일부는 너무 귀에 익은 것-정치권에서 사비(私費)를 제한하는 것, 시민 교육을 강화하는 것-인 반면에 다른 것들은, 노동자들이 어떻게 일을 처리할지 결정하는 노동자협동조합 설립과 사학의 폐지를 포함하는 등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급진적인 듯 보인다.  

 

◇ 유권자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테크로크라시 

 

그는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평등주의와 테크노크라시(과학 기술 분야 전문가들이 많은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 및 사회 체제)와의 융합을 설득력 있게 논박하고 있다. 왜냐하면 테크노크라시적인 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유권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그러나 그의 용맹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약속과 이론의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약속과 이론의 한계는 챈들러가 강조하는 부분이다. 롤스주의자적 체계는 상호 간의 관용 속에 함께 사는, 개인의 도덕성과 그들 스스로 좋은 삶에 대한 문제를 알아 낼 수 있는 여러 가지 가슴 속 깊이 간직된 약속을 가지고 사람들을 고무한다. 

 

정치에서 합의를 공경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것이 정치의 매력이라고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갈라진 틈새를 고려할 때, 그 또한 턱도 없다는 주장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Free and Equal”은 “롤스와 그의 비평가들” 에 대해서 상세한 장(章)을 쓰고 있다. 하지만 대개 롤스주의자적 체계와 반복적으로 부닥칠 수 있는 어떤 사안은 주변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느낌이다.  

 

“A Theory of Justice”가 간행 되었을 당시 이미 그의 사상에 대해 의견이 균열되고 있었는데 어떻게 전후(戰後)에 의견일치를 보게 되었는지에 대한 탐색적이고 명석한 역사(歷史)분석인 카트리나 포레스터(Katrina Forrester, 1986~ 영국의 정치이론가 겸 역사학자. 하버드 대학 사회 과학 부교수)의 “In the Shadow of Justice”(2019)에 관해 챈들러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얼마나 오랫동안 자기 책을 쓰는데 롤스를 붙들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만 기술

하고, 그녀의 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는지를 글의 맥락에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 자유주의 철학이 허용하는 급진적 비평 

 

그가 그녀의 책을 소개하지 않은 것은 유연한 행동인지 모른다. 그것은 화해의 형태로 포레스터의 책을 받아들이되 챈들러가 선호하는 용어로 동화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해서 아마 포레스터는 이러한 행동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자유주의 철학의 널찍함은 급진적 비평을 위한 가능성을 열어 놨다”고 말했듯이.  

 

그러나 어떤 철학이라도 냉혹한 현실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짜낼 만큼 무한하지 않다. 챈들러의 책 겉표지에 저자를 소개한 뛰어난 글 가운데 눈에 띄는 정말이지 시기가 적절하지 않은 글이 있다. 그 글을 쓴 컬럼비아 대학 총장인 네마트 샤피크(Nemat Shafik)는 최근 교수들과 맞서며 훈육의 선례(보통 은밀한 것이다)를 남기고 경찰을 학내로 불러 들여 친 팔레스타인 학내 시위를 해산시키는 등의 행동을 함으로써 공화당 의원을 달래려고 한 장본인이다.  

 

물론 샤피크 총장이 이 책을 쓰지는 않았다. 챈들러 또한, 그녀가 쓴 글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순 없다. 그렇지만 친 팔레스타인 시위를 해산시키려고 경찰을 부른 그녀가 양심적인 자유주의에 대한 찬가인 “Free and Equal”을 지지하며 글을 썼다는 사실이 왠지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지금 그들의 분노는 자유와 대척점인 전쟁 당사국에 대한 불평 등 때문일 것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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