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불교에서 경전 다음으로 ‘논(論)’을 쳐준다. 논으로 유명한 것으로는 ‘공’ 사상을 논한 용수의 ‘중론’, 대승불교의 논리를 설파한 ‘대승기신론’이 있다. 유교가 정치와 일상의 법도로 자리 잡았던 중국과 조선에서는 이 ‘대의명분론’이 위세를 떨쳤다.

 

‘명분’을 국어사전에 보면 첫째, ‘각각의 이름이나 신분에 따라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군신, 부자, 부부 등 구별된 사이에 서로가 지켜야 할 도덕상의 일을 이른다.’고 했다. 둘째, ‘일을 꾀할 때 내세우는 구실이나 이유 따위.’라고 했다.

 

첫째의 뜻은 「논어」 자로 편에 자로가 스승인 공자에게 정치를 맡기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자 ‘명’을 바로 하겠다’, 즉 ‘정명(正名)’이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둘째의 뜻은 첫째의 뜻에서 파생된 것으로 요즘에도 많이 쓰인다.
첫 번째의 뜻이 예전 유교 시대에만 통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고 오늘날에도 고위 공직자는 물론 경제인, 연예계와 스포츠계의 스타, 소위 공적인 직업인에게 가차 없이 적용되는 말이다.

 

유교에서 단 하나의 교리를 들자면 ‘명분’이라고 볼 수 있다. 임금은 왕으로서의 직분을 다해야 하고 신하는 왕에게 충성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자애로서 대하고 자식은 부모를 효로 섬겨야 한다. 부부간에도 각각 직분이 있다. 조선 시대 ‘예’는 명분을 자세히 규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법보다 우위였다.

 

중국은 동서남북으로 끊임없이 넘나드는 이민족으로 인해 항상 전란의 위협 속에 살았다. 잠시 누리는 평화 시에는 대의명분론이 우세했으나 전란이 일어나면 어쩔 수 없이 실용론이 고개를 들게 됐다. 그만큼 사상 면에서 유연한 모습을 띠었던 중국과는 달리 중원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데다 폐쇄적 대외정책이 더해져 조선은 대의명분론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강고한 대의명분론이 꼭 지리적 요인뿐일까.

 

대의명분 정신의 뿌리는 홍익인간 정신에 닿는 듯 약 2,000년간 여러 부족연맹 형태로 지속된 것으로 전해지는 고조선의 이념은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8자에 다 들
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고, 이치가 통하는 세상을 만들라’고 해석해본다. 여기서 ‘익(益)’자를 영어로 ‘profitable’이란 뜻으로 좁게 해석하지 말고 ‘넘치다, 더하다, 풍부해지다’라는 뜻이 함축된 ‘beneficent’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이치’란 인간으로서 도리,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경험적 원리 등으로 보면 틀림없을 것 같다. 환웅이 ‘주선악(主善惡)’, 즉 선악을 주관한다고 한 대목도 주목될 만하다.

단군신화를 단군사화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어느 쪽도 타당한 논리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단군신화라고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빛난다. 환웅이 인간 세상을 탐하여 지상에 내려와 홍익인간 정신을 설파하고 선악을 포함해 인간 세상의 여러 가지 일들을 이치로 다스리게 했다. 단군신화에서는 신의 절대자적인 능력을 보여주지도 않고 자신을 믿으면 복과 영생을 약속한다는 말도 없다. ‘인간들아, 서로 도우라, 그리하면 이로울 것이라, 사람들이여, 이치가 통하는 세상을 만들라’는 뜻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지상이 평화롭고 풍요한 세상이 될 것이라는 암시를 담고 있다. 단군신화에는 천국을 이상적인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천상에 사는 환웅이 오히려 인간 세상을 탐하여 내려와서 그의 홍익인간의 이상과 이치를 이 땅에 구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단군신화의 고매한 이상주의가 삼국시대에도 면면히 이어왔음을 ‘광개토대왕비문’과 ‘난랑비서’를 보면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이도여치(以道與治’라는 구절이 있다. 고구려 시조 추모왕이 하늘에 오르기 전에 세자인 유류왕에게 ‘이도여치(以道與治’ 즉, ‘도(道)로서 통치하라’라는 말을 남기도 승천했다. 광개토대왕비문의 맨 앞 시작 부분에 나오는 말인데, 고구려의 통치 이상으로써 광개토대왕과 비문을 만든 장수왕에 이르기까지 지켜왔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통치 이상은 단군신화의 ‘홍익인간 재세이화’와 연결돼 있음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난랑비서’는 최치원이 화랑인 난랑을 추모하여 쓴 비문을 말하는데, 삼국사기 진흥왕조에 비문의 서문만 짤막하게 기록돼 있다. 국사편찬위의 해석을 옮겨보면 “최치원이 「난랑비(鸞郞碑)」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이것을 일러 풍류(風流)라고 한다. 가르침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있는데, 실로 곧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뭇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와서는 효를 행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을 하는 것이 노(魯)나라 사구(司寇)의 가르침이요,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자연 그대로 일을 하면서도 말없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주(周)나라 주사(柱史)의 근본 뜻이요, 모든 악(惡)을 만들지 말고 모든 선(善)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축건 태자(竺乾太子: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노나라의 사구란, 공자를 이름이요, 주나라의 주사는 노자를 일컫는다. 나라의 현묘한 도를 일컬어 ‘풍류’라고 하고 그 기원과 내용이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다고 했다. 풍류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원문은 이렇게 돼 있다.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실내포함삼교 접화군생)’, 즉 풍류의 가르침은 실제로는 삼교를 포함하는 것으로 ‘접화군생’이라고 해석하고자 한다. 국사편찬위의 해석은 ‘삼교를 포함하여 뭇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라고 두루뭉술하게 풀었다. 화랑의 도란 풍류의 도이요, 풍류가 바로 삼교를 아우르는 플러스알파 정도가 아니라 더 근원적인 ’도‘라는 얘기로 풀이하고자 한다. ’접화군생’은 내용상으로 보건대 ‘홍익인간 재세이화’를 응축 시켜 놓은 듯하다.

성리학의 도입은 전통적 이치 정신의 회복 의미 담고 있어 흔히 제천의식과 홍익인간과 연결 짓는 경우가 있는 듯한데, 본질을 호도할 수 있다. 제천 의식은 유학과 노장사상에도 들어 있고 단군의 홍익 사상에도 포함돼 있고 무속 및 산천 사상에도 담겨 있다. 그러나 유학과 단군의 홍익사상에서 제천의식은 하늘을 공경한다는 뜻이 강하며 종교적 신앙의 의미는 희박하다. 단군의 홍익사상은 ‘홍익인간과 재세이화’ 정신이 본질이다. 공맹의 유학은 송나라의 주희에 이르러 태극과 이기(理氣)론으로 체계화·정교화됐다.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성리학 도입은 불교와 풍수사상으로 느슨해진 정신을 바로 잡기 위한 것으로 한민족 전래 홍익정신과 재세이화의 이치 사상을 회복한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조선 성리학은 밖으로는 대의명분론이요, 인간 내면으로는 경(敬), 즉 수양론으로 압축할 수 있다. 조선은 왜적에 의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여진족에 의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대의명분론으로 군신과 백성들이 정신무장하여 이겨냈다. 대의명분론이 적절하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대의명분의 정신으로 버텨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율곡 「성학집요」에서 엿보이는 대의명분 의식

 

율곡은 국가의 환난을 예방하기 위한 방책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이 살피건대, 사람이란 하늘과 땅의 중심입니다. 임금이 선한 정치를 베풀어 환한 기운이 하늘에 감응되면 상서로움이 이르게 되고,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많이 저질러 그 기운이 하늘에 감응되면 재앙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무슨 마음이 있겠습니까. 모두 사람이 부른 것일 뿐입니다. 다만 그사이에 상도가 있고 변칙이 있는 것입니다. 선에는 상서로움이 이르고 악에는 재앙에 이르는 것은 이치의 상도요, 선에 상서로움이 나타나지 않거나 악에 재앙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변칙입니다. 임금이 재앙으로 말미암아 자기 몸을 수양하고 반성하면 재앙이 변하여 상서로움이 될 것이요, 용렬하고 어두운 임금이 재앙이 없는 데에 익숙하여서 (수양을) 소홀하게 되면 오히려 재앙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대체로 하늘에 응하는 것은 진실로써 응하는 것이지 꾸밈으로써 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진실한 덕을 닦는다면 위태로운 것을 편안하게 할 수 있고, 어지러운 것을 다스려지게 할 수 있으며, 멸망하는 것을 보존케 할 수 있을 것이니, 어떤 재앙인들 그치게 할 수 없겠습니까. 오직 밖으로는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안으로 수양하고 반성하는 실상이 없기 때문에 하늘의 노여움을 돌이킬 수 없고, 나라 형세를 구할 수 없을 뿐입니다...환난이 이미 일어나 멸망의 모습이 드러난 뒤에는 비록 마음을 혁신하고 덕을 닦으려 하더라도 이미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앞 시대의 사람들이 실패한 자취가 서로 이어져 있으니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아! 성탕(成湯)은 스스로 꾸짖어 큰비가 천 리에 내리었습니다...이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진실한 덕을 닦은 효험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것을 본받으십시오.“(고산 역해 참고, 동서문화사)

 

 

조선 성리학이 지향한 대의명분론의 진수가 이 「성학집요」 속에 집약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율곡이 언급한 ‘하늘’이란 바로 우주와 자연의 이치에 다름 아니며, 인간과 국가에 닥친 재앙과 불운은 인간들이 스스로 잘못을 범해 불러들인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율곡의 글을 읽어보면 볼수록 신인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느낄 수 있다. 선조와 대신들이 율곡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아 임진왜란의 참화를 겪고 말았다.

 

오늘날 조선 성리학에 대한 비판은 홍대용, 박제가, 박지원 등 실학자들의 비판에 연유한 바가 크다. 그런데 실학자들의 비판을 보면 당시의 성리학자와 학풍을 비판한 것이지 성리학의 본질을 폄하한 것은 거의 없다. 양명학과 서학의 과학기술을 외면하고 오직 성리학의 담론에 매몰되어 실용을 소홀히 한 사대부들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대의명분이 부족한 실용주의는 뜻밖에 위험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 보면 지속성이 떨어질 수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논리를 통해 인간의 삶과 인간 세상의 도덕윤리를 굳건히 하고, 특히 정치의 대의와 운용 원리를 발견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더불어 퇴계와 대산 이상정 등 조선조 후기 성리학자들이 추구한 ‘경(敬)’ 사상은 서양의 경견주의 사상을 뛰어넘는 합목적적인 수양론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의 대의명분론

대의명분론은 사후에 역사적으로 평가하기는 쉽다. 그러나 당대에 실제 적용함에 있어서는 굉장히 어려울 터다. 제2차 세계대전을 되돌아보면 히틀러가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때 오로지 처칠 수상 혼자서 대의명분론을 내세우며 결사 항전을 주장했다. 영국 내에서조차 히틀러와의 타협을 주장하는 압박이 거셌다. 처칠은 1940년 5월 유명한 ‘피, 땀, 눈물’의 하원 연설로 대의명분론을 호소해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오늘날에도 우리 앞에는 미-중 대결 상황,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서 대의명분의 고민을 깊게 하는 외교 문제들이 연속적으로 대기하고 있다. LH 사건이란 것도 따지고 들면 부동산 투기를 반드시 뿌리 뽑겠다는 대의명분이 빚어낸 일이기도 하다. 역사는 대의명분론과 실용론 사이, 어느 지점을 그려가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MeCONOMY magazine April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