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현대인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근원적 조건인 불안을 너무 의식하고 있는데 반해 그 불안을 달래주고 미래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해주는 종교적 신앙심이 거의 퇴화해가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는 한편 개별 인간은 자기만족과 인권의식에 대해선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고 가족과 공동체 윤리와 연대감엔 불편해하면서 자기 파멸적 허무주의와 분열의 고통을 겪고 있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의 정신과 정치·경제·사회의 위기는 여기에 그 원인을 두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한국도 선진국에 서서히 진입해가면서 선진국들이 고통받고 있는 실패의 경로를 그대로 추수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도덕윤리를 숭상해왔고 하늘(하느님)에 대한 신심이 깊은 가운데 자연과 인간, 인간 상호 간의 조화를 추구해왔다. 우리가 서구 선진국들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국의 철학과 사상의 좋은 점을 되살려 오늘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종교적 믿음과 실천이 왕에서부터 귀족, 화랑, 백성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일치된 시대가 있었다. 신라의 통일 전후 시기와 전성기였다. 학자들은 그 시기를 제23대 법흥왕(514-540)에
한국경제가 1953년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반세기 남짓 기간에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할 수 있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걸까. 여러 원인을 들고 있겠으나 조선 선비의 ‘이치 탐구 정신’을 빼놓을 수 없다고 본다. 조선 유학의 치열한 이치탐구 정신의 뿌리는 우리 민족의 ‘재세이화’의 정신에 있다고 생각한다. ‘재세이화’에 대해 여러 모호한 해석들이 있는데, ‘세상을 보살펴 이치로 화하게 한다’는 뜻으 로 보고자 한다. ‘이(理)’는 이치(理致)로도 쓰인다. ‘재(在)’는 있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보다’, ‘살피다’의 의미도 있다. 세상과 인간의 이치를 추구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 민족 특유의 정신 전통은 조선 성리학에 와서 더욱 정밀해지고 나아가 퇴계 선생에게 와서 ‘하늘과 하나 되어 지극한 기쁨을 누리는’ 새로운 정신 및 종교적 경지를 열었다. ‘이치’는 형이상학적 진리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동양은 자연철학이 미발달하여 서양과학을 만나기 전까지 형이상학적 진리를 일관되게 추구해온 학문 전통을 갖고 있다. 형이상학적 진리는 우주와 자연의 관찰에 의한 가설과 선현들의 깨달음, 합리적 추론과 체험에 의한 깨달음 등을 근간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이다. 이것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경이롭고 미스터리한 부분을 들라하면 단연코 ‘단군사화’가 아닌가 한다. ‘한국의 정신문화를 찾아서’ 제1편 에서 홍익인간 정신을 다룬 바가 있는데 다시 살펴보자. 역사는 노년의 학문이라고 한다. 학문의 연륜이 쌓일수록 학문간 경계를 넘어선 통찰력과 세월이 주는 지혜로 빚어낸 글들이 나오기 때문인 것 같다. 어디 역사뿐이겠는가.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꾸준히 학문에 정진한 학자들은 대단한 업적을 내고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학계에선 정년퇴임 후에도 괄목할 만한 논문과 저술을 펴내는 이들은 극히 드문 것 같다. 그런 몇 안 되는 노학자 중에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가 있다. 신용하 교수는 학문적 스케일로 보면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에 버금가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는 인류 4대 문명 외에 한강문화와 대동강문화, 요하문화를 하나로 묶는 ‘고조선문명’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자는 2010년에 펴낸 그의 책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를 읽은 적이 있다. 신용하 교수는 작년 5월부터 문화일보에 이전 글을 업데이트 한 ‘고조선문명’에 대해 12회에 걸쳐 글을 썼다. 그의 글 중에서 홍익인간 정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토정 이지함은 토정비결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그의 국부론과 사회복지사상은 당대의 모순을 극복해 국부와 민생을 살리는 획기적인 방안으로 평가받아왔다. 이런 사실이 후대 학자들에 의해 조금씩 언급돼 오던 중 장용기 초당대 박사가 본격적으로 토정의 전생애와 기록물을 검토하고 나아가 그의 사회복지사상을 세계 복지사상의 효시로 알려진 영국의 구빈법 사상과 비교했다. 작년 2월에 출간 된 장용기 박사의 학위 논문 「토정 이지함의 사회복지사상 연구」를 중심으로 토정의 사회복지사상을 살펴보고 장용기 박사와 인터뷰 했다. 토정 이지함(1517-1578) 중종 12년에 태어나 인종과 명종과 선조대를 살았고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에 숨졌다. 그는 당대의 거유(巨儒)인 퇴계와 율곡, 남명과 동시대에 살았다. 이색의 6세손이며 조카 이산해가 영의정을 지낸 사대부 명문집안이었다. 본관은 충청도 한산이며, 생애 대부분을 마포강변에서 흙집을 짓고 살았다고 해 토정이란 호가 널리 알려졌다. 그는 역학과 수학, 천문지리학에도 밝아 후대에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토정은 1517년 충청도 보령군 청라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나이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작년에 모 한국철학 관련한 세미나에 참석할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 역사담당 교사가 연단에서 이제 “리기(理氣)‘논쟁이니 하는 말을 그만했으면 좋겠다. 요즘 학생들이 한자도 모르는데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조선성리학의 리기론과 사단칠정론을 어떻게 알아 듣겠느냐‘는 취지로 말했다. 요즘 들어 한국 철학이 초중고교 교과서에서 푸대접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 원인은 ’조선성리학‘이 학자 들의 논문 속에서나 거론되고 일반인에게 쉽게 전달되지 못하는 탓도 적지 않을 것이란 짐작이다. 조선성리학은 주자학을 기초로 조선에 꽃피운 성리학이다. 주자학은 우주·자연과 인간 세상의 근본 원리를 리와 기로 설명하고 인간 심성에서부터 정치·사회의 통치·운행 원리로까지 확장한 사상체계이다. 주자학은 ‘리’와 ‘기’의 개념만 이해하면 거의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리’란 우주자 연과 인간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는 근본 이치, 원리를 말한다. 또한 ‘리’는 그러한 존재 원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윤리적 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리’와 유사한 개념으로 ‘태극’이 있다. ‘태극’은 ‘천지만물
요즘 나라 안팎이 어지럽다. 전직 대통령들이 구속돼 있으면서, 또는 외부 활동이 제한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광화문과 국회 앞에선 시위가 그칠 새가 없다. 제조업 노조에서 건설노동자들까지 파업을 벌이고 있다. 거리와 시장 바닥을 일터로 삼아 새벽부터 늦 은 밤까지, 혹은 24시간 불 켜놓고 일하는 자영업자들이 ‘못 해 먹겠다!’고 난리다. 기업가들은 기업가들대로 숨 막힐 것 같은 규제에 분을 삭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 경제는 미중 무역전쟁과 일본의 수출규제라는 악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실로 내우외환에 처해 있는 지금, 복잡한 정치경제학적 처방보다 우리 역사에서 지혜를 찾아보는 일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때마침 숭실대 철 학과 곽신환 교수가 올해 정년퇴임을 앞두고 한국철학사상연구소에 '19세기 조선과 정역사상'이란 역작의 논문을 썼다. 그를 연구실 에서 만났다. 정년퇴임하는 교수들 중에 전공 책을 불태운 뒤 전공과 완전히 결별하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이와는 달리 정년 후에 더욱 공부에 매진하는 교수들도 있다고 하는데 곽신환 교수는 후자인 듯하다. 앞으로 쓸 책 제목 10여개를 써놓고 있으며 곧 ‘율곡’에 관한 신간이 나올 거란다
우리나라는 유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예 정신이 돈독했다. 중국으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칭송 받았을 정도로 조선 선비들의 예절 지킴은 각별했는데, 오늘날에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자랑스런 우리 예 정신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전통의 예 정신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회복 방안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였다고 말한다. 성리학이란 안으로는 덕을 닦고 밖으로는 예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덕과 예는 손바닥의 양면과 같다. 조선은 덕과 예로서 백성을 다스리려는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다. 덕은 수양을 중시하는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수양 정신은 참으로 대단했다. 예는 존비와 귀천, 장유, 친소의 차별성으로 나타났다. 이 ‘차별성’이 결국 문제가 되고 말았다. 고조선 이래 우리나라가 건강하게 간직하고 있던 예 정신이 법전화된 중국 예제가 들어오면서 흔들리게 된 것이다. 예학 연구가 김시황 선생의 저서 「한국예학연구논고1(동양 예학회 간)을 보면 조선 시대 예속의 뿌리를 이룬 「주자가 례」는 고려 말에 전래됐다. 「주자가례」는 남송의 주자가 편찬한 책이다. 이것은 고려말 안향이 성리학과 함께 들여 온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태극기와 훈민정음이 주역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주역 전문가인 이선경 박사에 따르면 주역 원리를 상징하는 태극 문양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 이 박사는 경주 감은사와 문무대왕 수중릉 사이에 있는 이견대(利見臺) 주역 건 괘에 나오는 이견대인(利見臺人)에서 따온 것이라고 말했다. 공자는 점서였던 주역에 통찰력 있는 「계사전」을 첨가 했다고 전한다. 주역은 성현의 반열에 오른 공자가죽 간의 가죽 끈이 끊어질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읽었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진 경전이다. 조선의 선비치고 주역을 탐독하 지 않은 자가 있었겠는가. 뛰어난 선비일수록 주역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퇴계도 몸을 해칠 정도로 주역을 공부했으며 독자적인 견해를 글로 남겼다. 정다산은 중국의 주역 대가들이 펼쳐온 논지와는 다른 접근법으로 「주역사전」 「역학서언」 등의 역작을 썼다. 정다산은 ‘주역사전은 내가 하늘의 도움으로 얻은 문자들이니 결단코 인력으로 알기 힘들고, 깊이 헤아린다고 도달할 수 있는게 아니다. 이 책을 깊이 읽어 오묘한 뜻을 깨닫는 자손과 붕우들을 천재일우로 만난다면 곱절로 사랑할 것이라’고 고백했다. 다산은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요즘 서구사회를 보면 거대한 바다 위에서 돛대가 꺾이고 키도 부서진 채 표류하고 있는 범선을 보는 듯하다. 서구사회를 지탱해왔던 교회가 세속적 이데올로기의 공격을 받고 신자들이 무더기로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서구의 전통적 가치가 무너진 자리에 지금 ‘전투적인’ ‘개인 인권’ 주의가 신성불가침의 교리마냥 기세를 떨치고 있다. ‘가족애’는 시골에서나 가야 볼 수 있을 듯하다. 극단적이고 왜곡된 개인주의가 ‘절대 가치’인양 활보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뉴질랜드 이슬람사원 학살테러에서 보듯이 이슬람의 극단주의와 화이트 내셔널리스트의 극단주의가 정면충돌하고 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서구적 공동체 가치가 우리의 본보기가 된 적도 있었지만 이제 그런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증오와 적개심으로 폭력화되는 서구사회를 보면서 조화와 상생, 공동체와 인간관계를 중시해 온 한국의 전통적 정신과 가치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흔히 서구대학에서 공부하고 온 학자들이 현대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한국과 동양의 전통에서 찾으려고 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찾아내지 못하고 갈수록 오리무중에 빠진 것 같다. 왜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 논설주간> 한국의 전통 예술품 중에서 조선 선비의 초상화는 도덕적 인간의 수양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그중에서도 조선 선비의 다양한 표상이 나타난 것으로 강세황, 윤두서, 김시습의 초상화를 꼽는다. 모름지기 초상화란 그 사람의 외모를 잘 묘사함과 동시에 인품과 삶의 궤적이 녹아나 있어야 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점에서 조선 시대 초상화는 세계 회화사에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조선 선비들의 수양정신을 눈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기 이를 데 없다. 조선 선비는 도덕 윤리적 삶을 실천하며 관직으로 나아가서는 왕과 백성을 위해 충성하고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도(道)를 추구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와 같은 수양을 정진함으로써 절제와 탈속, 품격의 경지를 스스로 드러냈다. 강세황과 윤두서, 김시습의 초상화를 보기만 해도 그들의 수양 정신을 그대로 알 수 있다. 율곡 이이가 선조에게 「성학집요」를 지어 올리면서 붙인 글을 보면 조선 선비의 정신세계와 삶의 목표를 오롯이 알 수 있다. 아래 글은 고산이 역해한 「성학집요/격몽요결」(동서 문화사)에서 인용했다. “제왕의 학문 본말과 정치의 먼저
기독교 이전에 우리나라에 전해진 종교와 사상 가운데 가장 백성들에게 친근했던 믿음은 단연 미륵신앙이다. 그도 그럴 것이 궁핍하고 멸시받는 사람들이 선업을 쌓으면 기쁨이 가득한 도솔천으로 갈 수 있고 미륵부처가 미래에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중생들을 빠짐없이 구제해주기 때문이다. 머리 깎고 출가하여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힘든 수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10선도를 지키면 된다는 것이다. 또 아득한 먼 미래일지라도 이 땅에 지상낙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주는 신앙이다. 10선도란 살생, 도적질, 간음, 거짓말, 이간질, 악한 말, 아첨, 탐욕, 성냄, 나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계율이다. 모두 실천하기가 쉽지 않지만 차차 나이가 들면서 과오도 뉘우쳐 가면 못 지켜질 건 없다. 이에 비해 유교는 엄격한 도덕윤리를 내세우기만 하고 ‘위안’과 같은 감성의 소통이 부재했다. 사후세계의 천국도 없었다. 유교는 실행 면에서 신분적 차별을 극복하지도 못했다. 조선 유교 시대에 불교는 미륵신앙으로 생명을 이어왔다고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조 말까 지, 오늘날 민족종교에도 녹아 있는 미륵신앙을 살펴보지 않고서는 한국의 정신문화를
한국사회의 정신문화가 국민소득 향상과 같이 보조를 맞추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효와 예절과 같은 전통적 정신문화 유산은 희미해지고 서구에서 들여온 과학정신과 법치주의는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사라져가는 전통 정신문화를 다시 살펴보고 현대 정신 사상을 우리의 시선으로 조명해보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첫 번째 글은 ‘홍익인간 정신’에 대해서 알아본다. 공자가 살고 싶었던 구이 땅, 후한서 동이전에 나오는 바대로 ‘동이는 천성이 유순해 삼방족과 다르며,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한 것이 그럴 듯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산해경에는 ‘군자국 사람들은 의관을 정제하고 칼을 찼으며 사냥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를 않았다’고 한다. 모두 중국 동부의 우리 민족을 묘사하는 말이다. 공자는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에 걸쳐 살았다. 공자가 직접 전해 들었던 동이 땅은 환웅과 단군 시대였으리라. 고조선 시대는 불교와 유학이 태동하기 전이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문화가 고스란히 숨 쉬고 있었던 시대였다. 우리 민족의 고유 정신이란 게 ‘홍익인간 정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유승국은 갑골문에 따르면 인(人)자는 본래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방족,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