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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기, 미모, 그리고 비운의 삶으로

이름만 들어도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삶을 살 것 같은 직업은 바로 영화 배우이다. 그들은 때로는 영화보다도 더 주목을 받고 대통령보다 더 유명하고 일거수일투족이 이슈가 되기도 한다. 연기로 유명하고 비운의 삶으로 유명하고 미모로 유명한 배우들만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골디 혼


“남자들은 바람이나 피우도록 놔두고 우리 여자들이 세상을 굴려야 한다” ‘조강지처 클럽’, 그리고 ‘죽어야 사는 여자’ 로 유명한 골디 혼. 크고 아름다운 눈을 눈을 가진 매력적인 골디 혼의 나이도 이제 예순을 넘겼다. 아담한 체격에 섹시한 그녀는 영화에서는 멍청한 금발 미녀로 이미지가 굳어있지만 코믹하고 지적이고 혁신적인 배우 중 한 사람이다. 특히 서구사회에서 독실한 불교 신자라는 점도 눈에 띈다. 골디 혼은 원래 댄서로 시작했다. 세 살 때부터 발레와 탭 댄스를 배웠고 ‘발레 뤼스 드 몬테 카를로’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1955)’에 코러스로도 출연한 바 있다.


골디 혼은 워싱턴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에서 드라마를 공부했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발레 학원을 운영했다. 그녀가 연기를 시작한 것은 전문 댄서로 일하다가 예쁜 외모와 재능이 눈이 띈 것이 계기가 됐다. 그렇게 TV에서 조연부터 시작한 그녀는 연기를 시작하게 되고 데뷔작 ‘선인장 꽃’에서 연기를 인정받으며 아카데미 조연여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된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경험했다. 골디 혼이 장년기 이후 출연한 작품들은 대부분 코미디 작품들이다. 그녀의 모습이 제일 빛을 바랄 때가 코믹 영화에 출연했을 때가 아닌가 싶다. 골디 혼의 세 자녀 올리버 허드슨과 케이트 허드슨, 와이어트 러셀도 그녀의 영향을 받아 모두 영화배우가 됐다.

 

라이자 미넬리


“현실이란 사람들이 그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어떤 것이다” 동성애자들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라이자 미넬리는 괴짜 같은 배역을 자주 연기한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인 라이자 미넬리는 영국 뉴웨이브 영화의 후기작인 ‘찰리 버블스’로 데뷔하였다. 괴짜 배역으로 유명한 배우로 알려져 있지만 ‘불임의 뻐꾸기’에서 가장 그 역할을 잘 해내서 큰 인기를 얻은 바 있다.

 

 60년대 말,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푸키 애덤스라는 학생을 연기했는데 처음에 그녀의 그런 모습에 끌렸던 고지식한 젊은이와 사귀게 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임신으로 버림받은 역할을 맡았다. 뮤지컬 영화에도 나왔는데 작품 이름은 ‘카바레’ 이다. 이 영화에서 샐리 보울즈 역을 맡으며 승승장구했고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게 되었다. 꿈이라는 것은 이뤄질 것 같으면서 이뤄지지 않고 사랑도 이처럼 똑같지만 그래도 만족스럽게 살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것을 샐리가 잘 보여주고 있다.


찰리 채플린


“웃음 없는 하루는 낭비한 하루이다” 영화배우 이야기를 할 때 찰리 채플린을 빼놓고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찰리 채플린은 영화에 있어서 그 기여도가 아주 높은 배우다.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을 달고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몸짓을 하며 가장 위대한 무성 영화배우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찰리 채플린은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과 고난을 겪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어머니와 힘들게 살아온 찰리 채플린은 9살이 되기 전에 2번이나 고아원 생활을 했다.


불우한 시절을 보내다가 뮤직홀에서 연기를 시작하며 코미디언으로 활동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곧 자신의 캐릭터인 ‘리틀 트램프’를 연기했고 대성공을 거두며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완벽주의자인 그는 영화를 감독하고 각본, 제작, 편집, 주연, 음악까지 맡아서 했는데 영화는 겉으로는 웃기지만 그 안에는 비운의 메시지가 담겨있는 슬랩스틱 코미디가 많았다.


네 번 결혼했고 열한 명의 자식을 낳았다. 수많은 스캔들을 만들어 내면서 1944년에는 친자소송까지 있을 정도였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영국인들은 그를 비판했다. 미국 정부는 그를 공산주의라고 비난했고 결국 1952년 미국 입국이 거부되어 스위스로 갔다. 이후 그는 1971년까지 한 번도 미국에 가지 않았다. 그가 죽고 난 후 가족들에게 돈을 요구하려고 무덤을 파헤친 사건도 발생했고 현재 그의 시신은 콘크리트 아래에 매장되어있다.


오드리 햅번


“조명에는 여자의 안색을 망치는 음영이 있다” 너무나도유명한 뷰티 아이콘인 그녀에게는 온갖 미모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옛날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녀의 미모를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그녀가 망언을 남겼으니 “내가 이런 얼굴을 가지고 영화에 출연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다”는 말이다. 그녀의 미모가 세세토록 기억되는 것은 그녀가 내적인 아름다움까지 갖추고 있어서 아닐까 싶다.
오드리 햅번은 암스테르담에서 모델로 활동하다가 파리와 런던에서 단역을 맡으며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영화 ‘로마의 휴일’ 에서 공주 역할을 맡아 순식간에 세계적인 스타가 된 그녀는 24살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녀가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에서 검은 드레스를 입고 뉴욕의 택시에서 내려 티파니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종이봉투에 담긴 아침을 먹는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후 그 드레스는 2006년 런던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41만 파운드에 팔려 영화에서 배우가 입었던 드레스 중 가장 비싸게 팔리고 가장 유명한 드레스가 되었다. 그녀의 연기 경력은 짧다. 1953년부터 1967년까지 겨우 15번의 주연을 맡은 것이 전부다. 그러나 그녀의 명성은 영화 경력처럼 짧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그녀는 할리우드 스타에서 국제 외교사절로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니세프와 함께 활동했다. 배우란 직업에서는 멀어졌지만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을 돕는 성인으로 다시 태어나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덴젤 워싱턴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네가 해야 할 것을 하라” 할리우드 흑인 배우들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한 배우 덴젤 워싱턴. 영화에서 항상 강력한 존재감을 뿜고 잘생긴 외모와 강한 남성성을 지녔던 그는 흑인에 대한 차별을 이겨내고 아카데미상을 두 번 수상한 최초의 흑인 배우가 됐다. 1954년 12월 28일 뉴욕 주 마운트버넌에서 태어난 덴젤 워싱턴. 그의 어머니는 조지아 주에서 미용사로 일했고 아버지는 교회 목사였다.

 

성인이 되어 포덤 대학에서 저널리즘과 드라마를 배웠고 뉴욕에서 본격적으로 연기 경력을 쌓기 시작한 그는 1977년 영화 ‘윌마’로 데뷔한 후 ‘세인트 엘스웨어’, ‘카본 카피’를 통해 영화계에 우뚝 서게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덴젤 워싱턴의 작품들은 대부분 진지하고 무거운 작품들이다. 그는 작품을 고를 때 매우 신중했는데 그런 그의 성격 탓에 코미디 영화에는 총 4번 출연했다. 영화 ‘말콤 X’에서 그는 흑인들의 인권을 찾으려는 훌륭한 연기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역할이 들어왔을 때는 그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MeCONOMY Magazine Decemb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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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장애아들을 평생 뒷바라지 하다 살해한 어머니에게 ‘집행유예’
선천적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들을 평생 뒷바라지하다 끝내 살해한 어머니에게 집행 유예가 선고 됐다. 창원지법 형사4부(김인택 부장판사)는 지난 1월 경남 김해시 주거지에게 20대 아들 B씨를 질식시켜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50대 여성 A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고 밝혔다. 중증 지적장애와 뇌병변을 앓고 있던 그녀의 아들 B씨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불편했다. 배변 조절이 불가능하고 식도가 아닌 복부에 삽입한 위루관을 통해 음식을 먹어야 했다. 종종 발작까지 일으키는 탓에 간병 없이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다. A씨는 이런 아들을 평생 보살펴왔다. 밤낮 없이 간병에 집중하면서 밝았던 A씨는 점차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았다. 원래 밝았던 성격이었지만 십여 년 전부터 우울증을 앓아 약을 먹어왔다. 그러다 2022년에는 만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까지 받게 됐다고 한다. 주변에서 아들 B씨를 장애인 시설에 보내라는 주변 권유도 있었지만, 아들이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다는 염려에 포기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9월부터 아래층 주민이 층간소음 민원을 제기했고, A씨는 아들로 인한 것인지를 우려하며 심한 불안 증세를 느꼈다. 범행 전날에도 관련 민원을 받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