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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산업의 변천사

1940년대에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 1930년대까지 할리우드는 황금기를 누리다가 1940년대에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서는 평균 50편 정도로 제작되었던 영화가 30편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전쟁 기간 중 미국 내 극장의 관객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우울하고 암울한 전쟁의 시기에 영화가 사람들에게 위안과 오락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들은 3분의 1정도만 전쟁에 대해 다루었고 나머지는 코미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에 더 치중했다. 이 시절에 만들어진 전쟁 영화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희망을 주고 싶어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애국심을 표현하고 승전의 짜릿함과 의욕을 바탕으로 형태를 취하는 모습을 갖추었다.

 

미군이 전쟁에 승리하면서 이탈리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할리우드 영화가 물밀 듯 쏟아지기 시작하였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할리우드와 경쟁할 상대는 없었다.


1940년대에 있어서 할리우드 영화를 특징지었던 것 중 하나가 ‘필름 누아르’ 라고 하는 독특한 표현 양식이다. 누아르의 역사적 탄생 배경을 살펴보면 첫 번째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수많은 유럽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몰려들었고 할리우드에도 감독, 카메라맨, 작가, 배우, 디자이너 등의 인력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1920년대 독일의 표현주의를 이끌었던 감독들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공포, 스릴러, 판타지 계열의 영화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두 번째, 프랑스의 시적 사실주의 계열의 범죄 영화들이 전 유럽과 미국에서 히트를 치면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줬다. 줄리앙 뒤비비에 감독의 ‘망향’이라 는 작품과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해는 떠오른다’ 라는 작품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들 속에서는 팜므 파탈이 등장하는데 팜므 파탈은 남성들을 유혹해 위험에 빠뜨리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들을 뜻한다. 누아르에 빠질 수 없는 특징인데 이 영화들에 이미 팜므 파탈이 등장하였다.


세 번째, 1930년대 중 후반부터 1940년대에 걸쳐 미국에서 많이 나왔던 대중소설들의 영향이 컸다. 특히 하드보일드 계열의 펄프픽션이 유행하였는데 이는 미국 사회의 어두운 측면과 잔혹한 범죄, 타락하여 일탈 행동을 보이는 인물들, 건전하지 못한 에로티시즘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누아르 장르에서도 볼 수 있는 공통으로 나타난다.


네 번째, 갱스터 장르가 1934년에 시행된 헤이스 코드 때문에 위축되자 누아르 장르는 변종의 한 형태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미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모두의 관심이 전쟁 상황에 쏠려 있다 보니 검열이 허술해지는 틈을 타서 많은 작품들이 이전보다 훨씬 과감한 표현을 하고 금기사항을 깨뜨렸다.


다섯 번째, 전쟁이 끝난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많아지면서 할리우드에서도 정신분석 이론이 유행하고 인간의 죄의식, 악몽, 우울증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영화에서도 이에 영향을 받아 인물의 소외와 절망감, 무력감 등이 표출되는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하였다.


누아르의 특징은 캐릭터, 주제, 극적 분위기 등이 전반적으로 어둡고 이야기의 주요 배경은 대도시의 어두운 뒷골목이며 비가 많이 쏟아진다. 그리고 특정 캐릭터 유형이 단골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터프하면서 비뚤어진 영웅, 팜므 파탈, 팜므 파탈의 덫에 걸린 희생자, 도시 빈민, 탐정이다. 누아르의 탐정들은 터프하고 폭력과 무정부적 범죄 세계에 살고 있는 남자들이다. 이들의 문제 해결방식은 과학적인 접근방법이 아니라 동물적이고 민첩함, 끈기, 무자비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세계로 배급


1950년대 미국은 풍요의 시대였다. 전쟁이 끝나고 실업률도 0에 가까웠고 엄청난 국부를 창출하던 시기였다. 도시에서 한적한 전원으로 이사를 하는 마이카 붐이 일어났고 이것은 영화 산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사람들이 전원으로 빠져나가자 자동차 전용 극장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도심 외곽에 대형 할인마트들이 생기자 복합 상영관(멀티플렉스) 형태의 극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수는 줄어들었다. 이는 과거에는 영화가 대중오락의 중심이었다고 하면 이제는 영화 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추구하는 여행과 취미, 즉 다른 취미 생활이 생겨나게 되었다. 풍요의 시대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자유의 시대가 1950년대이다.


연방 헌법 차원에서 비로소 영화는 새로운 언론 미디어로 인정 받았다. 이후 표현의 자유를 얻었고 엄격한 검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는 새로운 법의 보호를 받으며 상영 등급 심의만 받으면 되었다. 1946년에 등장한 텔레비전은 할리우드의 기둥마저 흔들흔들 할 정도로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다. 처음에 할리우드는 텔레비전을 우습게 생각했다. 작고 답답한 흑백 화면이 답답하게만 느껴졌고 텔레비전의 파급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텔레비전과 경쟁할 만한 것으로 다양한 와이드 화면의 기술을 개발하고 컬러필름을 본격적으로 채택하기 시작하고 사운드를 보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텔레비전의 위력은 단순히 큰 화면, 빵빵한 사운드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전체적인 것, 예를 들어 뉴스, 스포츠 중계, 다양한 신상품을 소개하는 광고 등에 있었다.


텔레비전을 우습게 봤던 할리우드는 당하기는 했지만 아주 망하지는 않았다. 텔레비전과 할리우드는 협력관계를 통하여 절충점을 찾고 공존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할리우드가 국제적인 영화산업의 중심이 된 것도 이 시대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세계 2차대전이 끝나면서 유럽의 훌륭한 영화 관련 인력들이 미국으로 많이 건너왔고 당시 만들어진 영화들이 194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초반에 걸쳐 유럽과 일본, 그리고 전 세계에 배급되었다.

영화산업의 커다란 변화

1960년대는 미국과 소련 간에 냉전이 깊어지면서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 살상 무기 개발과 우주개발 경쟁이 본격화됐다. 이러한 배경은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대에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붐을 이뤘다. 한편 프랑스의 몇몇 비평가들이 미국영화들을 재평가했다.

앙드레 바쟁, 프랑소와 트뤼포, 장 뤼크 고다르, 자크 리베트 등을 포함한 젊은 사람들은 매주 모여 할리우드 영화들을 관람하면서 다양한 토론을 벌였고, 카이에 뒤 시네마에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비평문을 실으면서 미국 영화가 단지 상업성에만 치중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완성도도 높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1950년대 말에 이르러 누벨 바그 영화 운동을 펼치면서 이로 인해 자극 받은 미국의 영화 산업에서 일하길 바라는 꿈나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 꿈나무들은 아서 펜, 샘 페킨파,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시즈, 우디 앨런, 조지 루카스, 스티븐 스필버그 등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뉴 아메리칸 시네마 운동을 펼치면서 할리우드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현대 영화와 그 이전 영화로 명확하게 갈라지는 경향이 생겨나게 됐다.


1960년대 할리우드는 영화의 제작에 있어 치밀한 사전 검증과 확실한 기획을 바탕으로 한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스팔타커스, 엑소더스, 엘시드, 바운티 호의 반란, 클레오파트라 등이 그 예이다. 하지만 블록버스터라고 해서 전부 성공하지는 못했다. 특히 클레오파트라는 흥행에서 쓰디쓴 참패를 했는데 이로 인해 이 영화를 제작한 20세기 폭스사가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후 사운드 오브 뮤직을 제작하면서 대대적인 히트를 기록했고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 힘 입어 환상여행, 혹성 탈출 등을 제작하여 줄줄이 성공했다.


1960년대 영화 중에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사이코를 빼놓을 수 없다. 이른바 아메리칸 나이트메어 혹은 모던 공포 영화의 시대를 연 것이다. 모던 공포 영화는 과거에 외부로부터 온 무시무시한 괴물 혹은 어떠한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현실에서 존재 가능한 것으로 영화에서 드러나게 됨으로써 공포 영화 산업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게 됐다.


웨스턴 영화는 1960년대까지 옛날 서부의 전통적 가치관이 변화되면서 영웅들을 비판하고 서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수정주의 웨스턴이 계속되었지만 1970년대 들어가서는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장르가 등장하게 된다. 클린튼 이스트우드가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인해서 큰 스타로 급부상하게 되었고 스파게티 웨스턴은 정통 서부극과는 완전히 다르게 돈이나 이권을 놓고 누가 더 폭력적이고 잔혹한가의 문제를 다루었다.

MeCONOMY Magazine July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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