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위기 연속의 시대 또는 복합 위기의 시대라고 칭할 만하다. 세계가 글로벌 네트워크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도 하고 한국의 위상도 예전보다는 부쩍 높아졌기 때문에 각 부문마다 평탄한 날은 드물고 위기가 아닌 날이 없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위기 다발 시대에 임진왜란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은 한없이 필요하고 소중하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할 때 비겁하고 어리석고 분열했던 사건들을 낱낱이 살펴보고 오늘날 어떻게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교훈을 얻지 못한다. 이순신 장군과 의병들의 혁혁한 공만 이야기하면 교훈은 커녕 과장된 자만심만 키우거나 수치를 덮어 또다시 같은 실패를 되풀이 할 우려가 있다. 왕조 체제의 한계 인식 필요 왕조 체제는 왕에게 절대 권력이 주어져 있다. 아무리 좋은 개혁안이라도 왕이 채택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조광조가 개혁안을 올려도 왕이 회피하면 그가 상소 한 개혁안은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부당한 정책도 심지어 사실이 전혀 확인 안되고 소문에 불과한 주장도 왕이 사실이라고 판단하고 명령을 내리면 그것이 바로 시행되는 것이 왕조 체제다. 임진왜란을 불과 3년여 앞두고 벌어진 정여립 역모사건으로 벌어진 기축옥
고대 이래 현대까지 우리 민족 전체에게 가장 끈질기게 깊이 영향을 미친 사상을 들라고 하면 ‘풍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풍수 사상은 한국인의 사상과 종교인 유교와 불교, 무속, 도교와도 공존이나 접촉 결합 될 수 있었다. 유교와 불교는 조선조 내내 배척 관계였고 유교와 무속 간은 불편한 관계였음을 상기해 보면 풍수 사상은 타 종교와 뿌리를 공유하면서 상보 관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은 뿌리라고 함은 풍수 사상은 하늘과 땅과 인간이 생기(生氣)로 상호 감응하여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다는 원리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천인 감응설이 풍수 사상의 근간이다. 천인 감응설은 한무제의 동중서에 의해 전지 자연과 인간 사이를 음양 매개로 하여 서로 감응한다는 체계로 정리됐다. 천인 감응설이 점차 각론으로 발전하여 갔는데 그 갈래 중의 하나가 풍수 사상이다. 풍수 사상은 한 나라 청오자의 「청오경」과 위진남북조 시기의 진나라 곽박(276-324)이 지은 「금낭경(혹은 장서)」에서 비롯 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 핵심 논리는 조상의 유골이 길 한 땅에 묻히거나 흉한 땅에 매장되는가에 따라 후손 들이 복을 받거나 화를 당한다는 동기감응론에 근거한
음양오행론은 우리나라 고대에서 조선말까지 우주 만물과 자연현상, 정치와 전쟁, 도덕 윤리적 가치, 남녀와 신분 차별의 논리, 개인의 길흉 운수를 설명하는 전가의 보도였다. 조선과 중국에서 음양오행론으로 설명 안하는 걸 찾기 힘들 정도로 너무 ‘위력적’이었다. 이 음양 오행론은 그럴싸하고 편리하고 신비로운 경이감을 느낀 나머지 지식인들이 감히 의심하지 않고 삼라만상의 크고 작은 일과 개인 길흉사를 해석하는 데에 몰두했다. 원래 음양오행론은 자연을 관찰하고 얻은 ‘통찰력’의 소산이었는데, 이것을 인간 세상사를 비유적으로 설명한 게 ‘화근’이 됐다고 할까. 그것이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와 추연에 의해 비유법의 범위를 벗어났고 한나라의 동중서, 북송의 주돈이(1017~1073)를 거쳐, 남송의 주희 (1130~1200)에 와서는 절대적 진리처럼 숭앙 되었던 것이다. 천지인 삼수 사상, 태극 혹은 무극과 이기론과 음양오 행론 간의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기는 하나 모두 추상적 논리로 구성한 가설이다. 그것들 사이의 ‘차이’를 논하 는 것은 학자들에겐 유의미할지 몰라도 대체로 ‘실용적’ 이지 못할 뿐이다. 더욱이 음양오행론과 태극·이기론을 토대로 도덕 윤리적 규범을 세움으로써
하나의 왕조가 뛰어난 창업 군주를 포함해 두세 명의 명군을 내놓는다고 치면 대략 몇 년 정도 유지되고 난 뒤에 왕조 교체가 이뤄지는 게 적당할까. 중국 왕조의 교체 기간이 적절한 기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중국은 이민족이 침입하기 용이한 중국 대륙의 한 가운데에 있고 내부 모순이 극에 달하면 반란이 일어나기 좋을 만큼 인구도 많고 농사 지을 땅도 넓다. 주로 북방민족인 이민족과 반란세력 중에서 뛰어난 지도자가 나오면 중국 내부의 모순으로 인한 민심 이탈과 결합해 혁명을 통한 왕조 교체가 가능했다. 중국 역대왕조의 평균 교체 주기는 넉넉하게 잡아 250년 안팎이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 왕조는 5백 년이나 지속돼 중기부터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졌고 말기에는 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해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혁명이라고 함은 최소한 정치세력을 바꿔야 한다. 정치 세력도 그 교체 세력의 폭과 깊이에 따라 혁명의 철저성 이 달라질 것이다. 여기에다 정치사상을 바꾸어 체제를 바꿀 정도라면 진정한 혁명이라고 할 만하다. 조선 시대에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동학혁명을 유일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정여립의 거사 사건이 있었다. 정여립 거사는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걸출한 왕의 후계자는 장남보다는 뛰어난 차남이나 셋째에게 넘어가는 사례가 많다.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일으킨 창업한 일등 공신이었다. 태조를 측근에서 보좌한 유학자 출신 관료들과는 달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형제들도 죽이고 정도전과 같은 거물 정적을 제거하고 처갓집도 멸족시켰다. 양녕대군은 외갓집에서 자라 외삼촌 민무구, 민무질 등 4형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하며 자랐다. 그 외삼촌들이 세자 양녕대군을 왕위에 올려 놓으려는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이런 무서운 집념의 소유자이자 잔인한 아버지 밑의 장남인 양녕대군은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쳤다. 양녕대군은 공부도 게을리하고 주색을 가까이해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자주 들었다. 어느 집안이든 아버지와 장남 간 은 묘한 긴장 관계가 있다. 아버지는 장남에게 바라는 기준이 높기 때문이다. 왕조와 명문 가문, 부를 물려줘 야 하는 아버지로서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아버지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으면 순탄한 관계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보통 이상으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태종과 양녕대군의 관계가 점점 악화하기만 했다.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의 바
조선은 성리학적 도덕 이상주의를 엄격하게 추구한 나라다. 그 높은 도덕률은 가상하나 ‘욕망’이란 선악의 원인자이자 발전을 위한 에너지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무지라기보다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도덕윤리 의식이 너무 강했다. 이상주의적 ‘마땅함’은 신분 차별과 경제와 기술 및 시장의 족쇄로 나타났다. 양명학이 도입됐으면 어떻게 숨통을 터 볼 수라도 있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다. 애초부터 성리학을 개선하는 정도의 실학으로는 개혁이 가능했을 것 같지도 않다. 천주교를 받아들인 조선인들은 체제에 불만을 가진 양반들, 가난과 억압, 소외로 인해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중인과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살아서 희망이 없다면 기꺼이 죽어서 천국 가기를 원했다. 기해박해에서 숨진 이호영(1838.11.25 옥사)을 보자. 그는 한강 북쪽 문막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붙잡혀 형조에 갇혔다. 아래 글은 「조선 순교자록」 (파리외방전교 회 아드리앙 로네·폴 데통브 신부 기록, 안응렬 옮김)에서 인용해 재구성하고, 쉬운말로 다듬었다. 재판관이 그에게 “너는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지? 누가 보든지 조상에게 제사를 안 지내는 자는 개나 돼지만도 못한
조선은 주자 성리학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주자 성리학이란 추상적인 논리로 엮은 일종의 도덕윤리다. 특히 주자 성리학이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인성과 수양에 집중하여 극단적인 순수주의랄까, 이론 세우기에 기울어졌다. 조선성리학의 개념에는 경제라는 것도, 생산과 노동이란 것도 물질과 기술이란 것도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불필요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의 눈에는 장사꾼의 이익, 부가가치라는 것은 부도덕한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조선조 내내 중국과의 조공 무역 외에는 외국과의 통상 및 교류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 전체를 조망해보면 중간에 중흥 시기가 있었다고 하나 시종일관 내리막길이었던 것 같다. 광복 후 실학 연구 붐에 일어나 근래까지 이어져 오다 보니 당대 실학자들의 생각들과 주장들이 주류인 것처럼 비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류였고 정치적으로 소외됐을 뿐만 아니라 설사 정치적으로 기용된다고 해도 국가의 곳간을 채우고 백성들의 삶을 기름지게 할 수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실학자들 중에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기독교인이 되려면 유학을 버려야 한다. 확고한 기성 이념과 종교가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종교는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불교에서 경전 다음으로 ‘논(論)’을 쳐준다. 논으로 유명한 것으로는 ‘공’ 사상을 논한 용수의 ‘중론’, 대승불교의 논리를 설파한 ‘대승기신론’이 있다. 유교가 정치와 일상의 법도로 자리 잡았던 중국과 조선에서는 이 ‘대의명분론’이 위세를 떨쳤다. ‘명분’을 국어사전에 보면 첫째, ‘각각의 이름이나 신분에 따라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군신, 부자, 부부 등 구별된 사이에 서로가 지켜야 할 도덕상의 일을 이른다.’고 했다. 둘째, ‘일을 꾀할 때 내세우는 구실이나 이유 따위.’라고 했다. 첫째의 뜻은 「논어」 자로 편에 자로가 스승인 공자에게 정치를 맡기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자 ‘명’을 바로 하겠다’, 즉 ‘정명(正名)’이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둘째의 뜻은 첫째의 뜻에서 파생된 것으로 요즘에도 많이 쓰인다. 첫 번째의 뜻이 예전 유교 시대에만 통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고 오늘날에도 고위 공직자는 물론 경제인, 연예계와 스포츠계의 스타, 소위 공적인 직업인에게 가차 없이 적용되는 말이다. 유교에서 단 하나의 교리를 들자면 ‘명분’이라고 볼 수 있다. 임금은 왕으로서의 직분을 다해야 하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왕에 관한 이야기, 외교와 전쟁 추이, 별자리의 움직임, 기이하고 신령스런 현상, 그리고 자연재해 기록이 거의 전부다. 그 가운데 자연재해 부분은 빠지지 않았다. 그만큼 왕조가 자연재해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학자 신형식 선생의 저서 「삼국사기 종합적 연구」(2011, 경인문화사)에 삼국사기의 천재지변을 자세히 논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천재지변 가운데 농작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연재해를 꼽아보면, 가뭄 108회, 홍수 42회, 대풍 32회, 지진 91회, 병충해 38회, 상해(서리 피해) 37회, 설해(폭설) 26회, 박해(우박피해) 36회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숫자는 신라와 고구려의 창건 시기인 BC 57년, 백제 창업 BC 18년부터 통일신라가 멸망하는 935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치면 그리 많은 자연재해가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자연재해가 있었던 해에는 어김없이 백성들이 크게 굶주렸을 것임이 틀림없다. 고구려 제9대왕 고국천왕(재위 179-197)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삼국을 통틀어 영명한 왕으로 칭할 만하다. 그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최초로 진대법을 실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서기 1567년에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했다. 2년 뒤인 1569년 허균이 초당 허엽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7세에 초시에 합격하고 결혼했다. 그는 서애 유성룡과 서얼 출신인 손곡 이달을 스승으로 삼고 문장과 시를 배웠다. 26세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첫발을 내딛는다. 1618년 그의 나이 50세에 광해군의 지시로 저잣거리에서 역모 혐의로 목이 잘려 처형된다. 허균은 16세기 후반에 태어나서 17세기 초에 죽은 인물이다. 유럽의 르네상스와 상업혁명, 산업혁명은 14세기와 16세기 사이에 살았던 예술가와 직인, 항해사, 군인 등 광의의 현장 기술자들과 상인들에 의해 시작됐다. 현장 기술자의 실험과 경험 중시가 17세기 대학의 아카데미즘과 결합하면서 과학혁명을 이끌어냈다. 유럽의 산업혁명과 경제발전을 논할 때 당시 천시 받았던 사람들의 점진적인 신분 해방과 자유로운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는 신분 속박으로 중하류 층들이 차별 받았던 것이 사회의 역동성을 근원적으로 떨어뜨렸다. 특히 조선이 중국에 비해서 훨씬 심한 신분 차별이 존재했다. 조선 시대에 신분 문제를 공개적으로 지적하고 천시 받던 계층들과 더불어 변화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깨달음’이 왜 중요한가 하면 깨달음이 있어야 행동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을 아무리 머릿속에 많이 쌓아 놓고 있어도 행동과는 그리 상관이 없다. 우리 주변에 머리가 명석하고 좋은 학교 나오고 박사 학위를 받고서도 행동이 영 아닌 사람들을 많이 본다. 지식만 많이 섭취하는 건 오히려 해로울 가능성이 높다. ‘지식’을 깨달음이란 과정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도그마’에 빠진다. ‘도그마’에 빠지면 자신의 행동은 되돌아보지 않고 타인을 정죄하게 되고 자꾸 꾸짖는 사람으로 변한다. 정치적 도그마와 종교적 도그마, 이념적 도그마는 사회를 편 가르게 하고 민심을 사납게 만들어 결국 폭력적 사회를 조장한다. 그렇다고 ‘깨달음’이라면 다 찬양받을 만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보편적 진리와 바른 도덕윤리의 기초 위에서 깨달음이라야 한다. 간화선에서도 이 점을 매우 강조한다. 불교의 보편적 가르침을 먼저 숙지 한 바탕 위에서 참구를 강조하고 있다. 극단적 종교지도자도 나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폭력을 서슴지 않는 논리를 펴고 테러를 행하고 있다. 이들은 보편적 진리와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를 보면 전생과 현생, 후생이 하나의 줄거리로 엮어진 이야기로 가득하다.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에 부처님의 전생인 전불 시대 가람 터가 7곳이나 있고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모시지 않은 절들이 없을 정도다. 이것은 불교의 근본 교리인 연기론의 세계에 연유한다. 연기론은 인간 세상은 물론이고 우주만물의 모든 현상은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이며 그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어 타자들의 결과를 빚는다는 불교적 진리다. 부처는 보리수 아래서 파천황의 이 연기법을 깨달았다. 이전에 인류가 ‘우연’의 공포 속에 살아왔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통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와 같이 초월적인 유일 절대신이 부여한 진리이자 명령이 아니라 신들도 거스를 수 없는 법칙으로서 연기법을 말한 것이다. 특히 브라만의 결정론적 연기론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와 평등을 내포한 연기론이었다. 이런 개명된 연기론으로 불교는 세계로 퍼져나갔으나 힌두교는 인도에만 갇혀 있게 된 것 같다. ‘연기법’으로 말미암아 힘없는 백성도, 천민도 마침내 자신의 삶의 고난을 알게 되었고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됐다. 연기법에 따라 내가 직접 행한 원인 제공이 가장 큰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