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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세계 주얼리 시장 규모


 
우리나라 주얼리 산업은 중국과 일본과 같은 대규모 소비지와 접하고 있고, 우수한 디자인 인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내 주얼리 시장에서 차지하는 외국 명품들의 점유율은 점점 높아만 가고 있다. 우리나라 주얼리 산업은 충분히 성장 잠재력이 있는데도 제도적 뒷받침이 되지 못해 외국 브랜드에게 국내 시장을 내주고 있다고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다. 더 이상 제도적 개선을 미룰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다는 지적이다. 이에 세계 주얼리 산업 현황과 국내 주얼리 시장, 그리고 우리나라 주얼리 산업 육성 방안을 알아본다. 

세계 주얼리 시장 규모
월곡주얼리산업연구소와 일본야노연구소에 따르면 세계 주얼리 시장의 전체 규모는1,386억 달러(159조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북미가 477억 달러, 중국이 366억 달러, 유럽이189억 달러, 일본이 80억 달러, 한국은 46억 달러, 러시아42억 달러이다.
이 통계를 보면, 중국의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성장했음을 알 수 있으며 한국 시장 규모도 결코 적지 않음을 파악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2009년 260억 달러에서 2010년 366억 달러로 무려 40% 이상 성장했다.
 일본과 유럽은 완만하게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2005년 145억 달러에서 2010년 80억 달러로 줄었으며, 유럽은 2005년 210억 달러에서 2010년 189억 달러로 감소했다. 2010년 국가별 금 주얼리 소비량을 보면, 인도 657.2톤으로 1위를 차지했고, 다음이 중국 451.8톤, 미국 128.6톤, 터키 70.6톤, 사우디 67.6톤, UAE 62.4톤, 브라질34.1톤, 인도네시아 32.8톤, 영국 27.3톤, 일본 18.5톤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는 15.9톤으로18위를 차지했다.
금 제조국을 보면 인도가 783.4톤으로 1위였고 그 다음 중국 508.6톤, 미국 180.9톤, 일본 157.5톤의 순이었다. 한국은 68.1톤으로 세계 7위의 생산국이었다. 한국의 금은 주로 수입한 철과 동을 제련해서 얻은 산업용 금이다.
다이아몬드 컨설팅회사인 Tacy LTD에 따르면 2010년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 규모는 원석이 125억 달러, 나석(원석을 연마한 것)은 171억 달러 규모이다.
킴벌리 프로세스에 따르면 2010년 세계 다이아몬드 생산량은 약 1억2천8백만 캐럿이다. 그 중 러시아가 27%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는 2위 보츠와나, 3위 콩고, 4위 캐나다, 5위 호주의 순으로 많이 생산했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생산국의 순위가 조금 바뀐다. 1위 생산국은 보츠와나, 2위 러시아, 3위 캐나다, 4위 남아공, 5위 앙골라 순이다. 이는 캐나다에서 생산되는 다이아몬드는 그 양은 적으나 질이 좋고, 호주와 콩고에서 생산되는 것은 양은 많으나 질이 떨어진다는 걸 말해준다.
세계 명품 시장의 규모를 살펴보자. 베인 앤 컴퍼니 자료에 따르면 세계 시장 규모는 2370억 달러(266조원)이다. 이 가운데 유럽이 877억 달러로 37%를 차지하고 미국이 711억 달러로 30%, 중국이 14%, 일본이 10%를 차지했다.

중국 주얼리 시장과 산업 분석
중국의 주요 주얼리 제조 지역은 광주의 심천과 판유 지역으로 중국 전체 주얼리 제조의 70% 이상이 이뤄지고 있다. 연간 제조액은 77억 달러에 달하며 2000개 이상의 제조회사에 12만여 명이 종사하고 있다.
또 산동성 중심으로 매년 300톤의 금과 17만 캐럿의 다이아몬드가 생산되고 있다. 중국의 금 생산량은 세계 생산량의 13%를 차지하며 2007년 이후부터 남아공을 누르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금을 생산하고 있다.
다이아몬드 생산량은 전 세계 생산량의 0.14%에 불과하지만 매장량은 매우 풍부하다. 또한 저장성을 중심으로 매년 1,300톤가량의 진주를 생산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 생산량의 95%를 차지한다.
중국 주얼리 시장은 지난 8년간 118%나 증가했다. 2009년 주얼리 시장 규모는 1,920억 위안(32조원)으로, 세계 주얼리 시장의 20%를 차지했다. 이 규모는 유럽 전체보다 크다. 또 2009년 골드 주얼리 소비량은 400톤으로 전 세계 골드 주얼리의 5분의1을 차지했다.

 
우리나라 주얼리와 명품 시장 현황
2011년 우리나라 주얼리 시장 규모는 5조3018억 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정도 규모는 세계 10위권 안에 든다. 또 금과 은을 포함한 주얼리 원자재의 수입과 수출물량도 7-8조원 규모로 주얼리 원자재 시장 면에서도 결코 작은 시장이 아니다.
2010년 한국에서 주얼리를 취급하는 주요 명품 브랜드는 15개로 144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5%의 시장점유율은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명품 주얼리 브랜드15개사의 총매출은 2400억 원으로 추정된다.
국내 시계 시장 규모는 1조7140억 원이다. 이 가운데 수입 시계가 1조3360억 원으로 전체 시장의 82.2%를 차지하고 있다.
2009년 전국 귀금속 보석 사업체는 전국 15,000여개에 이르며 이 가운데 37%가 서울에 집중돼 있다. 제조업이 1,372개소, 도매업 1,990개소, 소매업이 11,836개소로 나타났다. 전체 종사자수는 31,000여명으로 집계된다.
우리나라 명품 시장 규모는 5조원이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4년 동안 급속도로 성장했는데, 그 중 시계보석 분야의 4년간 성장률은 229%에 달한다. 의류 41%, 핸드백/지갑은 165% 증가했다.
현재 우리나라 명품 구매 인구는 35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성인인구의 1%에 해당된다. 월곡주얼리산업연구소와 한국 갤럽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연간 주얼리 구매 경험자는 성인인구의 18%인 685만 명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명품 브랜드는 루이비통, 구찌, 까르띠에 순이며, 명품 주얼리 브랜드로는 티파니, 까르띠에, 불가리 순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티파니12개, 까르띠에, 불가리 각각 20개의 매장이 들어와 있다.
현재 해외 수입 브랜드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1997년 0.1%에서 2010년 현재 5%로 50배 성장했다. 이 성장률대로 지속된다면 5년 뒤에는 국내 시장의25%를 점유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주얼리 시장의 해외 브랜드 점유율이 2000년 17.6%에서 2010년 26.7%로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외국 브랜드가 고급 명품 주얼리 시장을 장악할 날이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국내 패션 주얼리 시장도 떠오른다. 금값 상승이 보다 값싼 패션 주얼리의 구매를 촉진하는 것으로 보인다. 패션 주얼리는 코스튬 주얼리(costume jewelry)라고도 불리며 값싼 금속이나 보석, 모조석을 이용하여 만든 패션성향이 강한 제품을 말한다. 이 분야에서는 스와브로스키의 국내 시장 진출이 두드러지고 있다.

 
종로 주얼리 단지는 세계적 명소로서 잠재력 충분한데도…
종로 3가에서 5가에 이르는 종로 일대는 2천여 개 업체들이 들어서 있는 주얼리 밀집단지이다.
월곡주얼리산업연구소 온현성 소장은 “이렇게 한정된 지역 안에 제조와 도매, 소매, 원자재에 이르기까지 밀집된 곳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며 “한 장소에서 one-stop으로 처리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자생적으로 형성된 클러스터이기 때문에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온 소장은 덧붙였다.
종로 주얼리 단지는 80년대와90년대에 이어 2000년대 초반까지 외환위기 무렵을 제외하곤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그 이후 장기적인 경기 침체와 시장 양성화가 안 되는 바람에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어 서서히 쇠퇴하고 있다고 온 소장을 밝혔다. 지난 10년 동안 20% 정도 시장이 축소됐다.
서울시는 쇠퇴하고 있는 종로 주얼리 지구를 살리기 위해 2010년 주얼리개발진흥지구로 지정하고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종로는 중국인과 일본인 등 외국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명동과 광화문, 인사동, 청계천, 동대문패션단지에 인접해 있다. 주얼리는 이런 지리적 이점을 잘 활용할 수 있는 관광문화상품이다.
서울시는 현재 종로 주얼리 앵커 시설을 주얼리 업계와 함께 추진하고 있다. 종로 주얼리 앵커 시설은 관련 업체와 단체들을 관리하고 해외 바이어들과의 상담, 홍보 및 전시 공간, 관련 자료 구축, 인재 양성의 역할을 수행하는 장소를 말한다.
익산 단지 부활을 노린다
1970년대 익산귀금속단지가 조성된 계기는 다이아몬드 유사석인 큐빅 지르코니아(CZ) 등장 때문이다. 큐빅 지르코니아는 1970년대 초 소련 물리학연구소에 제조된 뒤에 전 세계로 퍼졌다.
당시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익산단지에 하청을 줘, 한동안 세계에서 가장 많은 큐빅을 이곳에서 연마해 선진국 시장에 공급했다. 다이아몬드 연마공장도 익산에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 노동자들의 임금이 높아짐에 따라 익산단지 업체들이 임금이 싼 중국 청도로 대거 이전해갔다. 이 무렵 남대문 일대의 액세서리 공장들도 중국 청도로 옮겨갔다.
이들 귀금속과 액세서리 업체들이 국내로 되돌아오고 있다. 청도에 진출했던 10여개 기업들이 중국 노동자들의 인건비 상승, 위안화 절상, 한국의 잇단 FTA 체결, 한류로 인한 한국 상품 선호현상 등의 이유로 복귀를 결정했다.
이에 고무된 정부와 익산시는 700억 원 규모의 각종 지원책을 제시하며 익산 단지가 다시 활성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주얼리 산업 진흥의 핵심: ①시장 양성화
온현성 소장은 “시대에 맞지 않는 개별소비세를 폐지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온 소장은 “주얼리를 고부가가치의 디자인 명품으로서의 발전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직도 사치품으로 보는 과거의 발상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개별소비세를 폐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개별소비세는 제품 값이 2백만 원 이상이면 제품 값의 20%를 물어야 되는 세금이다. 뿐만 아니라 그 20%의 30%를 교육세로 내야 한다. 결국 약 25%의 무거운 세금을 내야 하는 게 주얼리라는 것이다. 이는 수출품이든 수입품이 모두 적용된다. 금과 같은 원자재에게도 마찬가지다. 정부는2007년에 주얼리산업 발전방안을 마련하면서 개별소비세를 폐지하기로 해놓고도 발전방안의 추진력을 잃어버리면서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이처럼 세율이 너무 무거운 까닭에 업계는 200만 원 이상 고급 주얼리 상품을 잘 만들지 않고 실거래도 음성화되는 폐단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형편이다. 무거운 세금이 성장할 수 있는 산업을 죽이는 결과를 빚고 있는 셈이다. 이 바람에 200만 원대 이하 패션 주얼리 시장은 활성화되는 반면에200만 원대 이상 고가 시장은 외국 브랜드들이 공격적으로 마케팅하고 있다. 외국 명품 브랜드가 한국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데도 정부는 방관하고 있다.
폐쇄적인 주얼리 시장을 양성화한다면 상품개발과 마케팅, 수출이 활발해져서 고용창출은 물론 개별소비세가 있는 때보다 세수도 더 증가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지적한다.
금에 대한 부가세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금은 달러의 위험성을 보전하는 원자재이자 안전 자산인데, 다른 나라에 없는 부가세를 있음으로 활발한 거래를 막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정부의 결단이 필요하다. 아무리 서울시와 익산시가 각종 육성 대책을 마련해봐야 개별소비세를 폐지하지 않고서는 그 성과는 미미할 것이란 게 온 소장의 말이다.
 
주얼리 산업 진흥의 핵심: ②고객 신뢰
함량 속이기를 뿌리 뽑아야 한다. 금 순도와 다이아몬드 등급 시비가 불식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한 사건이 해마다 언론 보도에 오르내린다.
정부는 이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작년에 지경부 산하의 기술표준원에서 귀금속 제품에 대한 KS 표준을 제정고시 했다. 문제는 업계가 이를 잘 준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주얼리 산업 진흥의 핵심: ③경쟁력 제고
기술인력, 디자인 인력, 제품개발 능력이 제고돼야 한다. 이 분야에서는 한국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디자인이 대표적인데, 주얼리 디자인 전공학과를 갖고 있는 대학이 60여개에 이르고, 이곳에서 매년 2,300여명이 배출되고 있다.
패션 전공자도 비슷한 숫자로 배출되고 있는데, 패션 시장 규모가 31조원인 데 비해 주얼리 시장은 5조원 규모여서 매우 불리한 취업 여건이다. 하지만 정부가 제대로 된 진흥정책을 만들어 강력하게 추진한다면 풍부한 인력의 뒷받침으로 이른 기간 안에 도약이 가능하다는 얘기도 된다.
다시 말해 종로와 같은 제조 기반도 갖춰져 있고 인력도 풍부하고, 주얼리를 명품화하는 스토리와 이미지를 제공하는 한류라는 호조건을 갖고 있으므로 개별소비세 폐지와 같은 제도적 개선만 이뤄진다면 단기간에 성장이 가능하다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주얼리 브랜드는 스토리와 신화, 동경심을 먹고 자란다
티파니, 까르띠에는 한결 같이 스토리와 신화, 동경심을 갖고 있다. 품질과 디자인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골든듀와 드라마 『겨울연가』의 만남이었다. 이 드라마에서 배용준은 최지우에게 골든듀의 폴라리스(북극성) 목걸이를 선물하는 장면이 나온다.
2002~2004년경 국내와 일본에서 이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골든듀의 목걸이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아름답고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 속에 북극성처럼 변하지 않는 사랑의 징표로 소비자들에게 각인된 것이다.

시계 산업의 쇠퇴와 화장품 산업의 성공에서 교훈 얻어야
월곡주얼리연구소는 주얼리 산업과 화장품 산업, 시계 산업을 비교하다가 중요한 시사점을 얻었다.
2000년에 주얼리 산업과 화장품 산업, 시계 산업은 3조4천억 원에서 3조9천억 원대의 비슷한 규모였다. 그 후 10년이 지난 2010년에는 주얼리 산업은 약간 증가하는 데 그쳤으나 시계 산업은 1조2천억 원대로 뚝 떨어졌다. 이에 반해 화장품 산업은 7조9천억 원대로 급증했다.
화장품 산업이 급성장한 요인으로 첫째는 한류 확산이 꼽힌다. 그 다음으로 독자적 브랜드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셋째, 유통 개선이다. 그 결과, 국내 화장품의 점유율이 65%로, 수입 화장품의 침투를 잘 막아내고 있다.
한국 시계 산업은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성장산업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한 임금상승으로 인해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중저가 제품은 중국산이 차지해버렸고, 고급 시계는 스위스와 일본산이 점령해버렸다.
온 소장은 주얼리 산업은 시계 산업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말고 화장품 산업의 성공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주얼리 산업의 성장은 화장품의 성공에서 보듯이 한류라는 문화 마케팅을 이용하고, 한국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판매하고, 명품 브랜드로서 아시아를 중심으로 해외에 수출하는 전략이어야 한다. 온 소장은 아직 중국은 주얼리 분야에 관한 한 기술력과 디자인 능력, 순발력, 유통력 측면에서 우리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적 불황이 계속됨에도 명품 시장은 두 자리 수로 성장하고 있다. 이 몫을 LVMH, 리치몬드 같은 유럽 명품 그룹들이 장악하고 있다. 거의 모든 산업에서 서구를 따라잡았던 일본은 진주 브랜드인 미끼모토를 빼고는 명품 브랜드를 키워내지 못했다. 그 이유는 디자인이 못해서가 아니고 스토리와 신화, 아이콘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한류라는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류라는 좋은 여건을 갖고 있는데도 제도적 진흥방안이 마련되지 않아 국내 주얼리 기업들은 중소기업 수준에서 더 이상 크지 못하고 있다. 골든듀와 제이에스티나, 리골드, 미니골드, 우림FMG 등이 국내 주얼리 산업의 선두를 달리고 있으나 매출 규모는 1천억 미만에 머무르고 있다.

 
오보코 갤러리 송은주 실장 인터뷰
이번 호에서는 국내 최초로 한국과 프랑스 명품 브랜드와 공동으로 런칭한 오보코-마샥 브랜드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오보코 갤러리 송은주 실장과 인터뷰를 했다.

 
1. 먼저 오보코 브랜드를 만든 배경과 의미는 무엇입니까?
“부르다”를 뜻하는 라틴어 “보코(VOCO)”에서 유래한 OVOCO는 “아름다움과 행복을 부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OVOCO의 탄생은 아프리카 카메룬에서 시작된다. 풍부한 원석을 바탕으로 다이아몬드의 새로운 가치와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명품 그 이상을 뛰어넘는 브랜드로 커나가고 있다.

 
2. 2년 전에 오보코를 내놓았는데, 오보코와 다른 브랜드와의 차별 포인트 혹은 내세우고자 하는 특징은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다이아몬드 및 금 채광에서 주얼리 디자인과 세공, 판매에 이르기까지 OVOCO는 영원한 사랑과 행복을 약속하기 위한 원칙 및 규약을 만들어 이를 준수하고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주얼리 브랜드이며, 대 자연이 주는 PURE & NATURE 의 모티브 속에서 매년 새로운 컨셉트를 창조하고 하나의 스토리를 일관성 있게 전개해나가는 국내 유일의 명품 주얼리 브랜드라고 자부한다.

 
3. 전통적인 프랑스 브랜드 마샥과, 협업 브랜드인 오보코-마샥 브랜드를 작년에 출시했는데요, 마샥을 소개해주시고, 협업 브랜드의 컨셉트와 고객의 반응은 어떤가요? 
Marchak: 145년 전통의 프랑스 하이앤드 주얼리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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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롭고 상상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창작품들,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독특하고 귀한 발명품들, 그리고 삶의 환희(joie de vivre)! 우리는 이러한 수식어들로 Marchak의 작품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Marchak만의 풍부함과 독창성은 놀라울 만큼 성공적으로 두 문화, 즉, 러시아 문화와 프랑스 문화를 접목시킨 것에서 비롯된다. Marchak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1868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키에프에서 파리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여행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그 여행길에서 우리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석, 원석, 독특한 물건들을 수집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왕들과 나라의 통치자들, 즉, 우리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 역시 만나게 될 것이다.
 
이야기는 러시아에서 시작된다.
소년 Joseph Marchak는 14살이 되던 1868년 정든 가족과 그의 고향 키에프(역자 주 -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 당시에는 러시아의 영토였음)를 떠나 보석상점에 견습생으로 취직하게 된다. 그리고 10년 후 그는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게 되는데, 바로 그의 땀과 열정이 빚어낸 놀라운 운명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그는 사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의 전 재산을 처분하고 그의 어린 아내가 결혼 지참금 명목으로 가져온 귀금속과 100루블(역자 주 - 구소련의 화폐)까지 팔아야 했지만 그래도 자금은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가지고 있던 단 한 벌의 양복까지 팔고 나서야 그는 그의 첫 번째 작품인 금목걸이 하나를 겨우 제작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는 키에프 중산층 거주지역인 Kreschatik 4번지에 방 다섯 개짜리 아파트를 얻어 가난한 도심지역을 벗어나게 된다. 사업은 번창했고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만 갔으며 작품들은 점점 더 다양해졌다. 잘 나가는 젊은 목걸이 제작자 Joseph Marchak는 온갖 기념품과 보석제작 그리고 금세공 작업으로 인해 사생활을 누릴 겨를도 없이 쉬지 않고 작품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진화해 갔다.
시간이 흘러 1885년, 그는 수많은 직원들을 거느리는 회사의 사장이 되어 있었다. 19세기 끝 무렵 당시 러시아는 경제적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으며 주문은 폭주하였다. Joseph는 다수의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느라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 노브고로드 등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끊임없이 신제품들을 디자인했다. 1880년부터 1917년에 이르는 기간은 러시아-프랑스 외교관계의 밀월기였다. 러시아는 프랑스를 통해 경제성장 및 근대화를 이룩하였으며 프랑스는 ‘스텝제국’(Empire of the Steppes) 러시아에 매료되었으며 톨스토이의 소설을 통해 ‘신비로운 슬라보니아 정신(the mysteries of the Slavonic soul)’에 마음을 빼앗겼다. 프랑스 독자들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Anna Karenina)’에 열광했으며 여주인공인 안나 카레리나는 당시 프랑스의 어린 소녀들이라면 모두 그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해졌다.
1890년부터 Joseph Marchak는 그의 사업을 프랑스로 확장하기 시작한다. 6년 후 러시아의 짜르(황제) 니콜라스 2세는 파리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다리(bridge)가 될 ‘알렉산더 3세 대교’ 건설을 시작하였고 호화로운 파티들을 열어 모든 도시에 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대교의 건설을 알렸다. 러시아는 프랑스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프랑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891년, 러시아는 모스크바에서 러시아-프랑스 전시회를 열기로 하고 모든 유명 예술가들과 프랑스 사치품 사업가들이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도록 했다. 이에 관심을 가진 Joseph는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 제작에 몰두하기도 했다. 1893년, 그의 명성은 대서양 건너 미국에까지 알려져 ‘시카고 유니버셜 전시회’(Universal Exhibition of Chicago)로부터 메달을 수상하게 되고 그 후 1894년에는 앤트워프(역자 주 - 벨기에의 항구도시)에서 상을 받게 된다. 타국으로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그는 신기술 개발 및 제품화를 위해 투자했다.
그 어떤 것도 그를 멈출 수 없었다. 심지어 1899년 그의 공장이 화재로 다 타버렸을 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공장의 규모를 확장하고 현대화하였으며 시대를 선도하는 혁신적인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는 키에프에 위치한 매장과 공장에150명의 직원을 고용하였다. 20여년 후, Joseph Marchak는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보석 사업가가 되었고 그의 명성과 브랜드는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1913년 짜르 니콜라스 2세가 키에프를 방문할 당시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을 기념하여 그에게 바쳐질 모든 공식적인 선물에는 Joseph Marchak의 서명이 찍히게 되는데 이는 그의 명성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명성은 더 이상 높아질 수 없을 만큼 높아져 ‘키에프의 까르띠에(the Cartier of Kiev)’라 불리게 되고 그 유명한 Faberge의 라이벌로 떠오른다. 한편 1890년에 태어난 Joseph의 막내아들 Alexander Marchak는 그 당시 Beaux Arts와 Arts Deco Paris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는 혼돈과 불안의 시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보석사업은 더 이상 지속될 수가 없었다. Joseph Marchak는 64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앞 다투어 그들의 고국을 떠나 유럽지역으로 이주하였고 Joseph Marchak의 가족 또한 마찬가지로 고국을 떠나 유럽으로 향했다. 그들은 Joseph이 남긴 마지막 작품들을 품 안에 숨겨 가지고 갔으며 Joseph의 아들 중 하나였던 Joachim이 파리에서 그들을 맞았다. 새로운 기회의 땅에 들어간 것이다.
 
1920년대의 Marchak 상점의 두 번째 탄생
파리는 디자이너, 노동자, 보석상인들이 업무에 복귀하면서 활력을 회복한다. 그러나 경제적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물가 상승과 우유, 설탕, 육류, 와인 등과 같은 식료품 부족이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전쟁의 악몽을 잊으려는 듯 광적인 나날들이 시작되었다. 여성들은 Victor Margueritte의 소설인 <사내 같은 아가씨>의 여주인공을 따라 하기 위하여 짧은 네모 스타일로 머리를 잘랐으며, 또한 코코샤넬의 영향을 받아 더 이상 코르셋을 입지 않았다. 모조 보석들과 값싼 잡화류들이 유행 했다. 또한 이 기간은 재즈와 Man Ray 사진의 시대이다. Montparnasse에서는 축제가 한창이었으며 다다이스트들의 예술행위는 Desnos의 <Bal negre>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화려한 시대에서, Alexandre Marchak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빠른 시일 안에, 화려한 La Paix 거리에 있는 큰 매장을 찾아낸다. 이 매장은1898년도 개장 이후로 멈추지 않고 외국인 부자들이 몰려오는 Vendome 광장과Ritz 호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화려한 간판의Vendome 광장과 La Paix 거리에는 이미 명성이 자자한 디자이너(Worth, Doucet)와 조향사(Guerlain), 여러 명의 보석상과 금은세공사(Melierio, Vever, Cartier, Van Cleef). 장갑제조인, 셔츠 제조업자, 모자 제조업자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버지인 Joseph에게 노하우를 계승 받은 Alexandre는 Palekh에게서 받은 영감을 모티브로 삼아 능숙하게 그 시대의 엄밀한 형태를 배합하면서 러시아의 예술적 기법을 전혀 버리지 않고 당시의 영감을 가지고 기발한 부속품 등을 만드는 데 탁월하였다. 순식간에 명성은 드높아졌고, 1925년 Arts déco전시회에서 여러 번 상을 수상한다.
Marchak은 시대 흐름을 따랐지만 만족하지는 않았다. 새와 꽃 모양의 브로치와 여러 색깔이 합쳐진 부채는, Marchak 매장을 사로잡는 Stravinsky의 각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음표들과 동일할 만큼 아름다웠다.
독창성과 높은 퀼리티 그리고 원리에 충실한 그의 자세는 그에게 파리 최고급 보석세공인의 위치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이 유럽 전역을 휩쓸게 되자, 고급 보석세공의 쇠퇴는 피할 수 없었다.

1950년, Marchak의 새로운 시대를 향해서
제2차 대전 직후 Alexander Marchak는 Rue de la Paix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떨쳤던 유명 디자이너인 Alexander Diringer를 고용하였고 Marchak는 1960년대 후반까지만 Marchak의 디자이너로서 활동하였다.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Jacques Verger가 Marchak의 일원이 되었다. 시계수리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보석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독창적인 디자인 그리고 가장 유망하고 유행을 선도할 수 있는 제품을 선택하는데 있어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Jacques는 ‘잇링(It-ring)’(바로 그 반지, 마음을 사로잡는 반지를 의미)의 디자인을 생각해 냈다. 이후로 Marchak는 Jacques Verger 및 그의 디자이너들과 공동으로 보석을 디자인하게 된다. Alexander Marchak는 뛰어난 업무능력을 발휘하여 파리 시내에 파리 부띠끄(Paris boutique)를 오픈하고 새로운 브랜드를 개발한 뒤 1957년 은퇴하였다.
 
미국의 시대
1961년 Cinquime Avenue에서 개봉된, 영화 ‘Breakfast at Tiffany’s(티파니에서 아침을)’이 시작하는 장면에서 Audrey Hepburn(오드리 햅번)은 야회복을 입은 채 다이아몬드로 가득 채워진 Tiffany라는 유명한 보석상점의 진열창을 쳐다보며 아침을 먹는다. 이 유명한 영화는 한 시대에 큰 영향을 미친다.
60년대 미국 상류층 사회의 젊은 여자들은 사치품, 유행, 보석, 원석, 웅장한 것들을 좋아했으며, 아침부터 착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것에서 행복감을 느꼈지만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았다. Jacques Verger는 이것을 빠르게 이해하여 호화스럽고, 색깔이 있는 보석들을 그의 미국인 고객에게 제안을 한다.
이 당시 가장 혁신적인 것은 나비와 꽃으로 장식된 선홍색, 에메랄드색, 사파이어색의  장식핀이었다. 이러한 매력은 상투적인 프랑스 보석세공술의 고전적인 전통을 과감히 결별한 것으로 Marchak 상점의 성공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1988년에 상점 Marchak가 완전히 문을 닫았지만 상표의 명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안목 있는 수집가와 애호가들이 꾸준히 경매장에서 그의 작품들을 잊지 않고 찾았기 때문이다.
몇 년후 Alexandre의 조카의 아들이자 Grégoire의 아들인 Marchak박사는, Marchak란 이름을 가지고 그의 형과 함께 그의 증조부의 브랜드가 다시 살아나길 바랬다. 마샥의 옛 장인들을 불렀다. 그는 드디어 마샥의 전통을 지켜내면서 다채롭고, 현대적이며, 섬세한 새로운 Marchak 정신을 창조했다.
2000년에 발레에서 전시가 시작되었고, 2002년에는 일본에서, 2003년에는 웨스트팜비치에서, 2004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성공리에 전시가 이어졌다. 2004년 12월 8일에 St Pétersbourg의 Marchak상점에서도 전시회가 열렸다.
협업 브랜드의 컨셉트는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과 가장 프랑스적인 아름다움의 결정체이며, 일상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티브로 재탄생 시키고자 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의 가치에 빠져 들게 마련이다. OVOCO와 Marchak의 협업 브랜드인 OVOCO-Marchak의 첫 번째 컬렉션”Hanbock Knot”(한복의 아름다운 옷고름을 모티브로 한 디자인)와”Beloved”(14세기 프랑스의 약혼반지를 재현한Unique한 디자인)을 만나는 고객이라면 누구나 그 아름다움과 정교하고 기품 있는 OVOCO-Marchak만의 세공력에 매료될 것이다.

 
4. 딕스 브랜드에 대해서도 소개 해주세요. 딕스 가맹점도 소개해주세요.
DIKS 는 2000년에 문을 연 국내 명품 다이아몬드 주얼리 브랜드로써 자체 제작과 자체 디자인을 기반으로 탄탄하게 성장한 명품 주얼리 브랜드이며, 현재 DIKS는 씨앤케이 다이아몬드의 가맹점 브랜드로써 자리매김을 하였으며, 전국 100여개의 가맹점을 보유하고, 브랜드 이미지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다.

 
5. 오보코 갤러리 매장을 찾는 고객들의 상품 선택 경향을 말해 주세요.
OVOCO Gallery 를 자주 찾는 고객층은 연령대 구별 없이 다양하며, 특히 마니아 층은 OVOCO만의 특별한 디자인에 관심을 갖고 선호한다. 특히, OVOCO에서 취급하는 다아야몬드와 진주 및 유색보석 등은 전문가들이 엄선한 최상의 품질이며, 제작과정 또한 국내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장인들의 손길에 의해 탄생된다.
또한, 평생 단 한 번뿐인 예물을 가치 있게 소장하려는 고객들이 오보코를 즐겨 찾는다.

 
6. 오보코가 그동안 내놓은 오보코와 딕스 디자인 컨셉트를 설명해 주세요.

OVOCO Concept 
OVOCO Collection 2011 “PURE & NATURE
OVOCO Collection 2012 “SCENT OF A WOMAN”(여인의향기)으로 이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진한 향기를 머금은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OVOCO는 크게 세 개의 라인  으로 이루어지며, 20~50대를 아우르는 디자인이다.
웨딩: INNOCENT (순수, 그 빛나는 가치: 심플하고 깔끔한 스타일) : LOVE MIRACLE (사랑의 기적: 화사하고 화려한 스타일) 중년층(40대 이상): ARTE (내면의 기품이 빛나는 순간: 볼륨감 있고 클래식한 스타일)
패션(30대~ 50대): BOLSSOM (시간의 가치를 뛰어넘는아름다움: 폭넓은 연령층에 맞는 패션 유행스타일)
 
DIKS Concept
DIKS COLLECTION 2011 “PURE LOVE”
DIKS COLLECTION 2012 “ROMANTIC GARDEN”으로 이어진다.
웨딩 주얼리를 주 품목으로 하는 취급점 전문 브랜드인 DIKS는 웨딩주얼리시장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주며 FLORAL, ARIA, PURE WHITE의 세가지 라인으로 출시되는 제품을 통해 현재 웨딩주얼리 트랜드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DIKS 웨딩주얼리: FLORAL(꽃, 나비, 자연을 모티브로 한 화사한 스타일) : ARIA(곡선이 강조된 세련된 스타일) : PURE WHITE(기본을 강조한 심플한 스타일)
 
7. 오보코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자사 공방을 갖고 있다고 들었어요. 어떤 이점이 있는가요?
외주 공방을 가진 브랜드라고 반드시 불리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OVOCO는 대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순수를 모티브로 한 디자인과 자체 운영하는 공방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고객의 니즈를 최대한 반영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이는 원본, 캐스팅, 조립, 세공, 폴리싱의 모든 과정이 숙련된 장인의 손길로 이루어지며, 디자인과 제작의 완벽한 조율 끝에 탄생하는 OVOCO는 최고의 주얼리를 만들겠다는 자부심과 타협을 거부하는 고집스러운 장인정신이 담겨있으며, 여과 과정 없이 외주 공방에서 단순히 제작된 제품과는 달리 퀄러티와 예술성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8. 외국 명품 보석 브랜드들이 국내 시장의 점유율을 높이고 있는 가운데 국산 브랜드의 발전을 위해 디자인 측면에서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는가요? 아울러 오보코가 티파니와 까르띠에처럼 되기 위해서 어떤 점에 노력을 해야 할까요?
OVOCO는 해외 명품 못지않게 그 기술력과 제작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춰진 상태이다. 주얼리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키워드는 디자인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단순히 예쁜 디자인이 기본이라면, 이제는 제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감성 디자인이 절실히 필요할 때이다.
OVOCO만의 Brand identity와 소비 연령층별로 감성을 재해석하여 OVOCO만의 스타일로 탄생한 디자인을 꾸준히 연구하고 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9. 오보코 갤러리의 시설은 외국에 비교해서도 손색이 없다고 들었어요. 시설, 운영 등을 소개해 주세요. 예약제로 운영된다고 하는데, 아울러 말씀해 주세요.
OVOCO Gallery는 국내 최대 규모의 주얼리 갤러리로서 미술전시, 음악회, 문화강좌 등을 지향하는 복합적 문화 공간이다. 조용하고 공기 좋은 성북동 주택가에 위치해 있으며, 아름다운 주변 자연환경과 품격 있는 갤러리가 잘 어울린다.
OVOCO Gallery를 찾는 고객이라면 누구나 이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으며, 특히 예약제로 운영되는 시스템이므로 조용한 가운데 고객만의 특별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특히, 무료로 실시되는 문화강좌에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10. 보석 한류의 가능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정부와 업계, 종사자들이 각각 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 평소 갖고 있는 생각들을 말씀해주세요.
한국의 주얼리 세공 기술력은 이미 세계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업계 종사자들은 화려한 이면의 영세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 쉬운 예로, 해외 명품브랜드를 선호하는 고객층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해외 브랜드는 정찰제로 운영되며, 고가 대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그 값을 지불하는 반면 국내 브랜드에는 너무 인색한 것 같다.
주얼리 제품이 만들어 지는 데는 디자이너의 숭고한 아이디어와 장인들의 수많은 손길을 요한다. 하지만, 단순하게 금값과 다이아몬드의 원재료 값만을 따지는 소비자들의 의식구조는 성숙해야 하며, 주얼리 업계의 자기 살 깎아 먹기 식의 영업활동 또한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부 또한 한국 주얼리 산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육성 기반을 재정비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OVOCO Gallery 연락처
Tel : 02-742-7768/www.ovoc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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