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7세의 바이러스 연구자인 권혁진 박사는 기온이 35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그의 유일한 소일거리라는 충청남도 금산의 작은 야산을 찾아갔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 낫을 들고 풀을 베고 마치 어린 자식처럼 여러 작물을 보살피고 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이 맺힌 얼굴 모습은 산속의 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 덕택인지 건강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그의 딸들은 아버지를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표현한다. 일제 식민지 시절 초등학교를 다녔고, 낮에 일하며 야간 중·고등학교를 마쳐야 했던 가난한 소년이었다. 전쟁과 궁핍의 잿더미에서 벗어나려고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온 경제개발과 민주화 시대를 오로지 바이러스 배양 시험관만을 붙잡고 살아온 권혁진 박사의 삶이 전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의 두 딸들의 얘기와 권 박사가 후배 연구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듣고 제3부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장녀(권순애)_"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 아버지는 항상 아침에 일어나보면 안 계셨어요. 어머니에게 아버지 어디에 가셨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러 산에 가셨다고 하셨죠. 그때 우리는 안양 수리산 아래에 살았는데 아버지의 영어 단어카드들을 넣어두는 나무상자가 있었어요. 어머니가 우리에게 그 나무상자를 보여주셨는데 나무상자 안에 영어 단어를 써놓은 카드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죠."
"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자부심이었던 것을 어린 마음이었지만 느낄 수 있었어요. 아마 다른 형제들도 같았을 거예요.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는 산에 가실 때도 주머니에 영어 카드를 늘 넣고 다니신다고 하셨어요. 아마 저는 아버지의 영어단어카드를 보고서 그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영어 선생님이란 직업을 가졌으니까요. 제 딸이 둘인데, 둘 다 영어를 잘해요. 큰 딸은 지금 미국에서 영어박사 학위를 공부하고 있고, 둘째 딸은 영어 소통에 문제가 없어요. 이게 다 아버지의 영향일 거란 생각이 들어요."
차녀(권순주)_ "언니와는 저는 두 살 차이에요. 저에게 있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연구소에서 돌아오시면 무조건 책상에 앉으셔서 공부하셨던 모습이에요. 저희들에게 공부하란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지만 공부하는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죠. 1960년대 중반 처음으로 안양에 우리 여섯 식구가 단란하게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했어요. 그때도 초가집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사라지고 있었을 무렵이었는데 우리 집이 초가집이었어요."
"아마도 공무원 봉급으론 싼 초가집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담장도 없어서 아카시아를 울타리 삼아서 심었죠. 150평 정도 되는 집이라 텃밭이 꽤 넓었는데 거기에 무, 배추, 호박, 각종 채소도 심고 꽃도 많이 키웠어요. 또 돼지, 닭, 개, 토끼도 키웠고요. 아버지는 퇴근하시고는 마을에 돌아다니며 음식 찌꺼기와 인분을 수거하러 통을 들고 나가곤 했죠. 그러면 우리 둘이서 그 뒤를 졸졸 따라갔어요. 인분이 통에서 넘쳐흐를 땐 창피하단 생각도 했지만 좌우간 철이 없던 때 잖아요. 즐겁게 아버지 뒤를 쫓아다니던 기억이 나요. 아버지는 인분을 집으로 가져와서 퇴비로 만들어서 채소에 뿌렸죠. 언니와 저도 돼지 먹이를 주기 위해 동네 집집을 다녀서 음식찌꺼기를 거둬왔고요. 그때가 우리 식구들의 가장 단란했던 추억이었던 것 같아요."
차녀(권순주)_ "우리 형제들은 네 명입니다. 공무원 봉급으론 네 명의 자식들을 다 대학에 보낼 수 없잖아요. 부모님은 우리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부업을 하셨어요. 돼지 키우는 거는 아버지만 한 게 아니고 어머니도 많이 하셨죠. 어머니는 집 담벼락을 터서 슈퍼도 하시고 마지막에는 미용실도 하시고 하숙도 치셨어요."
장녀(권순애)_"우리 식구들만 살던 단란한 시절은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끝났어요. 아버지가 10살쯤 되었을 때 병환으로 어머니를 여의었어요. 아버지가 장남이었는데 저한텐 할머니죠, 10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평생 그리워하는 걸 봤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는 새 장가를 드셨죠. 그러다 할아버지도 장년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요. 제가 초등학교 3학년일 때 아버지는 계모와 이복동생들을 거둬들여 한 집에서 살게 됐어요. 두 집 살림을 도저히 꾸릴 형편이 아니라고 판단한 어머니의 결정으로 한 집으로 합친 것이죠. 아버지는 8남매의 맏이었는데 그땐 우리 식구들 중에 봉급을 받는 사람이 아버지밖에 없었죠."
"어머니가 매일 고모, 삼촌, 그리고 우리 거, 하여간에 도시락을 거의 10개씩 쌌어요. 아버지는 밤에도 연구소에 늦게까지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저녁 도시락까지 평생 챙겨주셨어요. 우리가 도시락을 연구소에 가져다 드린 적도 있고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장남으로 큰 며느리로 모든 책임을 다하셨던 것 같아요."
Q. 아버님도 훌륭하시지만 어머님이 더 훌륭하신 것 같습니다. 아무리 1960년대라고 하지만 이복동생들까지 다 돌봐주신다는 거 지금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아버님의 성실함은 대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에서 비롯된 부분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차녀(권순주)_ "어머니는 그 어려운 시절에서도 항상 긍정적이었어요. 어떤 힘든 일도 안 된다고 한 적이 없었어요. 저보고는 반드시 4년제 대학을 가라고 하셨죠. 아버지가 일평생 흔들리지 않고 연구와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받침이 큰 역할을 했을 거예요. 아버지가 공부할 때는 우리들을 조용하게 했고, 맛있는 거 있으면 아버지 몫을 남겨놓은 다음에 저희들이 먹도록 했죠."
장녀(권순애)_ "어릴 때 벽장 위에 바구니가 놓여 있었어요. 어머니에게 저 바구니에 뭐가 들었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어요. 어느 날 자다가 깼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두런두런 얘기하는 걸 듣게 됐어요. 자는 척 하고 실눈을 뜨고 보니,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감을 깎아 드리고 껍질을 바구니에 담더라고요. 아버진 딱딱한 감을 아주 좋아하셨어요. 전 그 모습을 보고 우리 엄마, 아빠가 서로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푸근한 안도감, 행복함 같은 거를 느꼈죠."
Q.부모님이 어떻게 만나 결혼하셨어요?
장녀(권순애)_ "아버지가 다니던 가축위생연구소의 직장 선배님의 따님이셨어요. 외할아버지 되신 분은 연구원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를 쭉 지켜보시고 그 성실함을 보고 자신의 딸을 시집보낸 거죠. 딸에게 ‘이런 남자, 그 어디에도 못 만난다.’ ‘그는 공부로 크게 성공할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Q. 아버님은 취미가 없었나요?
장녀(권순애)_ "탁구를 치시긴 했는데, 취미라고 하긴 힘들죠. 아버지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연탄을 방마다 다 갈고 동네 골목을 빗자루로 쓸었어요. 눈 오면 쓸고, 동네 가축 예방접종도 해주셨고요. 우리 가족들, 예방 접종도 손수 주사를 놓아주셨어요. 아버지는 전설이라고 할까요. 자식들 손톱도 깎아주시고 언제나 한결 같은 모습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돼주는 것 같아요. 가끔은 우리와 탁구를 치셨어요. 연구소에 있는 정구장에서 왜 테니스를 치지 않느냐고 아버지에게 물었던 것 같은데 그때 아버지께서 테니스가 격렬한 운동이잖아요, 점심시간에 테니스를 치고 나면 오후 근무에 지장을 준다고 했죠. 평생 부정한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던 걸로 기억나요."
차녀(권순주)_ "두 달 전에 할머니가 96세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와 9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은데, 아버지가 평생 어머니로 모셨죠. 아버지의 이복동생들은 아버지께서 어릴 때 돌봐주셨던 걸 고마워하죠."
Q. 지금 아버님 연세가 87세인데, 연구하시는 게 힘들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나요?
차녀(권순주)_ "전혀 아닙니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요즘에 바이러스가 이전보다 더 잘 보인다’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돈 안 받아도 좋다. 연구만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씀하시고요.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가 걱정돼 그만 쉬시라고 하지만 연구하시는 게 좋다는 걸 어떡합니까.(웃음) 집에서 연구소에 가려면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데도 연구하는 걸 좋아하세요. 연구소에 나가지 않는 휴일에는 부모님 산소가 있는 산에 가시죠. 그 산에 몇천 평의 땅을 가지고 계신데, 사과나무, 배나무, 밤나무, 그리고, 파, 둥글레, 호박 등 각종 채소와 약초를 기릅니다."
“한 우물을 파세요”
우리네 보통 인생은 늘 방황한다. 아마도 욕심 때문이리라. 남의 얘기에 쉽게 흔들린다. 90세를 바라보는 권혁진 박사에게 일 원칙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한 우물을 파세요” 평범한 진리를 거듭 힘주어 강조했다.
권혁진 박사_ "제가 바이러스만을 60년 연구했습니다만 일본이나 미국, 호주 등 선진국에선 바이러스 중에서 하나의 바이러스만을 연구합니다. 우리 연구자들은 승진과 진급을 위해 전공을 버리고 다른 영역의 과로 옮겨 다닙니다만 선진국 연구자들은 하나만 깊게 팝니다. 이것저것 하면 겉핥기로만 알게 되기 때문에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바이러스는 전자현미경으로만 보이지만 오랫동안 바이러스를 연구하다 보면 전자현미경 없이도 바이러스의 성질을 다알 수 있게 되지요.(웃음)"
" 우리나라 연구자들은 아직도 한 우물을 파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선진국에선 바이러스한 개만 평생 연구하기 때문에 그 바이러스에선 세계 첨단을 달리게 되는 겁니다. 전공을 여러 개 해가지고는 그저 남 따라가기도 벅차게 됩니다. 일본의 가축시험장에 가봤더니 돼지콜레라만 연구하는 연구실이 있더군요. 우리나라 가축위생연구소의 과보다도 연구원이 더 많아요. 일본 연구원들은 하나를 놓고 이것저것 다 시도해보는 겁니다."
"일본의 구마카이라는 돼지콜레라 연구자는 돼지콜레라를 처음으로 시험배양에 성공해 세계적인 학자가 된 분입니다. 나의 박사학위 심사위원이기도 하죠. 사이언스지에 1950년대 중반에 그 무렵까지 못하던 돼지콜레라의 시험배양법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의 돼지콜레라 전문가인 베이커라는 학자가 구마카이 교수를 초청해 미국 시험실에서 해보라고 했죠. 미국에서는 안 되는 겁니다."
" 창피를 당한 구마카이 교수는 일본 시험실에서는 되는데 미국 시험실에선 왜 안 되는가를 더 깊이 연구를 했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조직배양에 사용되는 소 혈청에 돼지콜레라 외에 설사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같이 있었다고 해요. 동일한 항원조직에 두 개 이상의 바이러스가 존재하면 다른 것을 죽일수 있거나 억제한다는 획기적 사실을 발견하는 개가를 올린 것이죠. 구마카이 교수는 돼지콜레라 연구를 파고들어 자신의 당초 연구 결과를 증명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 1960년대 여러 과학 잡지에 대대적으로 발표했습니다. 구마카이 교수의 발견은 지금도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큰 업적입니다."
Q. 토종벌에 관한 지난 번 논문발표에 대해 국내에서 반응이 나왔습니까?
권혁진 _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토종벌을 감염시키는 색브루드 바이러스를 제가 처음으로 시험실에서 배양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는데도 반응이 없습니다. 바이러스를 시험실에서 조직배양을 할 수 있어야 후속 연구가 가능합니다. 그걸 증명했는데도 관심들이 없어요. 미국에선 반응이 오는데, 한국에선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가난과 결핍, 도전의 자산이 되다
평균적 연령대의 한국인으로서 가장 연배가 높은 1930년대 태어난 사람들을 만나보면 공통적인 의식을 느낄 수 있다. 가난과 결핍이란 시련을 불평불만의 거리로 삼지 않고 오히려 도전의 자산으로 여기는 긍정심이다. 권혁진 박사는 가족과 사회를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연구 일에 일평생 헌신했다. 3부에 걸쳐 그의 삶을 취재하면서 ‘헌신’ ‘성실’ ‘정직’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특히 직업인으로서 우리에게 들려준 말, “일평생 한 가지만 하라”는 말씀이 왠지 이 시대의 화두인 ‘일자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MeCONOMY magazine August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