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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76년 붓과 인연... 석재(石齋) 김용선 화백

자연을 재해석 ‘고도의 정신세계 담아내는 작가’

 

[M이코노미 김소영 기자] 김용선 화백은 목포상고를 나와 조선대 법대를 졸업했다. 대학시절에는 정치인을 꿈꿨다. 당시 정치인을 따라다니면서 세상을 배우고자 했던 그는 진도군 일곱 개 면 중 조도면을 제외한 여섯 개 면의 조직관리를 하며 결코 순탄치 않는 길도 걸었다. 군에 입대한 후에는 베트남에 파견됐고 거기서 경제에 눈을 떴다. 그리고 지난 76년 붓과 인연을 맺은 후 오직 한 길을 걸어오고 있다. 현재는 한국예총 진도지회장, 한국미술협회 고문,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 전라남도 초대작가 등 미술계 대부로 활동 중이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석재(石齋) 김용선 화백. 초중고 시절 줄곧 미술부에서 활동했던 그는 서라벌예고에 진학하고 싶었다. 당시 상고는 졸업만 하면 은행에 들어갈 수 있는 최고의 학교였으며 은행은 제일 좋은 직장이었다. 지금 같으면 우겨봤겠지만 당시는 어림없는 소리.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부모의 뜻에 따라 목포상고로 진학했다. 공부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오직 그림에만 관심 있었던 김 화백은 은행에 들어가려고 공부한 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2때 진학 반으로 옮겨서 공부했는데 운 좋게 조선대학교 법정대학에 합격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너는 머리가 좋으니까 조금만 공부에 신경 쓰면 뭘 해도 되겠다’고 하셨죠.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까 하숙집 주인이 목포에 있는 행남 자기에 소개시켜주더라고요.”

 

고민됐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차피 붓을 잡을 거라며 제대로 그림공부를 해보자고 다짐한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인 금봉 박행보 선생을 찾아갔다. 대담한 결정이었다. 

 

“당시 우리 진도에는 내로라는 작가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꼭 그림을 배우고 싶었어요. 선생님께서 저를 보시 더니 깜짝 놀라더라고요. 대학 다닐 때 정치인 되겠다고 돌아다니며 조직관리를 하다 보니 워낙 모난 생활을 했으니까요. 그림을 배우러 왔다니까 정색을 해요. 차라리 다른 작가를 소개시켜 주겠다는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선생님 밑에서 그림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고 했죠. ‘왜 하필 나냐’고 물으시길래 선생님 아니면 제 자세가 바로 잡아지지 않을 것 같다고 했죠.”

 

 

무작정 짐 싸들고 집 나와 하숙

 

김 화백은 지난 1976년 금봉 박행보 선생을 사사했다. 처음부터 순탄했던 건 아니다. 무작정 짐을 싸 들고 집을 나와 금봉 선생이 사는 집 근처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한 그는 언제 제자로 받아줄지 모르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림에 대한 기초 지식을 머리에 담기 위해 책을 읽고 오라고 하지 않아도 매일 아침 금봉 선생 집으로 가서 하루 종일을 보냈다.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건 분명 힘든 일이었다. 딴에는 열심히 하는데 보름이 지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처자식 두고 와 있는데, 해도 너무 하는 거 아닌가. 하소연 할 곳이 없어서 사모님을 붙잡고 처량한 처지를 호소했다.

 

“한 열흘쯤 지나니까 선생님께서 부르시더니 채본을 해주면서 매일 30장씩을 그려오라고 하더라고요. 죽도록 그렸죠. 30장을 가져가려면 적어도 100장은 그려야 그중에서 괜찮은 것으로 추려갈 수 있잖아요. 한 번은 부르시더니 ‘자네 재주가 보통이 아니네’ 그러면서 ‘내일부터는 아침 7시에 오게’ 그러더라고요. 사람들이 오기 전에 제 그림을 봐주려는 거였죠.”

 

여러 달이 지나고 김 화백은 금봉 선생 집으로 아예 들어가 살았다. 곱게 자라서 빗자루 한 번 잡아 보지 않았지만 새벽 6시면 일어나 대문 앞까지 깨끗이 청소했다.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그를 보고 주변에서는 뭔가 일을 낼 거라며 혀를 내둘렀다.

 

“제가 그림 공부를 하고 있을 때 광주항쟁이 일어났죠. 고향에는 두 딸과 곧 출산을 앞둔 아내가 있었지만 거둘 처지가 못 됐습니다. 한 번은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아들을 낳았다고 해요. 마음은 달려가고 싶지만 그림 배우는 사람이 그럴 수 있나요. 사모님께서 그걸 아시고 보자기에다 뭔가 가득 싸주면서 다녀오라고 위로해 주더라고요.”

 

 

미술대전이 있거나 국전이 있을 때면 전국에서 내로라는 작가들이 출품작을 가지고 금봉 선생을 찾아왔다. 모두 국전에서 입상도 하고 특선도 한 작가들이었다. 그들은 금봉 선생의 수제자에게 그림 보여 주는 걸 꺼려했다. 그럴 때면 금봉 선생이 꼭 그를 불렀다.

 

“스승님 방에 들어가면 대문짝만한 그림들이 여러 개 걸려 있었죠. 스승님께서는 ‘자네가 한 번 골라보게’ 늘 그러셨어요.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럽니까?’ 그러면 ‘보는 눈은 자네나 나나 똑같네’ 그러시면서 늘 저를 칭찬해 주셨죠. 그러다 그분들이 가시고 나면 ‘저게 작품인가?’ 그러면서 제 실력을 인정해주셨죠. 그럴 때면 어깨가 으쓱했어요.”

 

인생살이 글로 담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상 수상

 

김 화백은 금봉 선생 밑에서 꼬박 4년을 배웠다. 그런 다음에 고향인 진도로 내려가 오직 그림 그리는데 몰두했다. 그가 대나무그림을 집중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스승인 금봉 선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스승님께서 대나무를 소재로 한 ‘묵죽작품’으로 문광부 장관상(현재의 대상)을 받고 국무총리 상을 받았어요. 그림이 완성되면 글을 쓰시곤 했는데 그 솜씨가 대단하셨죠. 그럴 때면 늘 뒤에서 스승님이 쓰신 글을 메모해 와 밤새 외웠었죠.”

 

자연을 정신세계에 몰입시켜 자연을 재해석해 고도의 정신세계를 담아내고 있는 석재(石齋) 김용선. 그는 오랫동안 글씨체 연구해 몰입해서 자기만의 글씨체를 개발하는데도 성공했다. 아무리 제 잘났다 해도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낄 곳이 없는 게 이 세계라고 말한 그는  작가는 오직 그림실력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저는 스승님이 국전 심사위원인데도 ‘저 한 번 챙겨주십시오’ 이런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그림으로 승부를 보겠다고 다짐했던 것이죠.”

 

이상했다. 보기엔 흠잡을 데가 없는 작품인데도 입선할 수 없었다. 참 자존심이 상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출품작을 준비할 때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작품에만 몰두합니다. 저도 상당히 예민한 상태였어요. 광주로 올라가 아예 방을 잡았어요. 어떤 주제로 작품을 낼까 고민하다가 밥을 먹으러 갔는데 식당 입구에 큰 선인장이 있는 겁니다. 그걸 출품작 구도로 잡고 그림을 그렸어요. 멋진 글을 한 줄 써 넣고 싶었죠. 매화나 대나무 그림에는 한시를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선인장에는 어울리지 않았어요. ‘서러운 세월,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온 당당함이 참 군자답다’는 제 인생을 시로 적었습니다. 이 작품으로 국전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 특선 및 대상을 받았습니다.”

 

 

작품 속에 담긴 지역 특성...어쩔 수 없어

 

“모든 작품에는 각자의 특징이 담겨 있어요. 지역적 특징과 어떤 스승께 배운 건지 그림의 계보 같은 것이죠. 심사할 때 이름을 가려도 누구의 작품인지 다 보입니다.”

 

김 화백은 심사위원으로 많은 활동을 해왔다. 그는 작품을 심사할 때 깐깐한 기준을 정해놓고 한다. 오직 작품성만 평가를 하되 꼭 상을 줘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경력이 많거나 나이가 많은 작가, 그리고 여성 작가나 장애를 가진 작가에게 기회를 준다는 원칙이다. 심사가 끝나면 바로 자리를 떠서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도 그의 원칙 중 하나다.

 

“머물 이유가 없죠. 심사위원이 심사를 했으면 됐지, 거기 남으면 뭐 합니까. 한 번은 국전 심사를 하러 갔더니 운영위원을 하라는 겁니다. 20명이 넘는 심사위원들이 모였죠. 이번 심사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대해 심사위원들이 각자 책임을 진다는 각서를 써주면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 그에게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고 했다.

 

“참 어이없는 일이죠. 2002년 국전에서 대상을 받을 때 상금을 받았는데 경찰청 특수부에서 전화가 왔어요. 조사할 게 있으니까 서울로 올라오라는 겁니다. 이거 시골작가라고 만만하게 보는 건가. 안 오면 구인한다고 해서 갔더니 통장 조회부터 하더라고요. 돈은 없고 마이너스 통장을 쓰고 있으니까 왜 이걸 쓰냐고 해요. 그림 그리는 작가의 생활이 녹록지 못하다고 했죠. 대상받아 나온 상금 어디에 썼냐고 물어서 평생 고생시킨 집사람 줬다고 했더니 미안하다고 하면서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밥이나 먹자는 겁니다. 당시는 기분 이 좋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잊지 못한 추억인 것 같아요.”

 

그림도 격을 맞춰야 제대로 된 그림

 

석재 김용선 화백. 그는 스승인 금봉 선생의 작품세계를 따라간다. 금봉 선생의 채본을 따라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닮아 간 그는 붓질은 이제 그의 정신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그림은 기본을 제대로 배운 다음에 차츰 자기의 그림세계로 가야 합니다. 자기 혼자 도취돼서 그리는 그림은 제대로 된 그림이라 할 수 없어요.”

 

김 화백은 세상의 모든 것에 격이 있듯이 그림도 격이 있다고 강조했다. 격을 맞추게 되면 처음 딱딱하게 느껴졌던 그림이 점점 자신의 작품이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러운 작품이 된다는 것.

 

“요즘 방송을 보면 유명 연예인들이 자신의 유명세로 작품 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림은 유명세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영혼이 들어가 있지 않은 그림은 작품이라 할 수 없죠. 물론 작가들이 큰 대작을 할 때 제자들과 함께 공동작업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작품 전체를 맡기는 게 아니라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하나의 감독 체계를 이루는 거죠.”

 

 

개인전을 한 번도 열지 않은 ‘김용선 화백’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은 전시회를 열어 팬들과 조우한다. 김 화백은 전시회가 단순하게 그림을 전시한다기보다는 작품을 파는 기회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 전시회를 열어서 작품을 하는 작가는 손에 꼽힐 정도라는 것. 김 화백 이 개인전을 열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작가 여러 명이 한꺼번에 출품하는 그룹전에는 작품을 냈지만, 개인전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김 화백은 언젠가 부산에서 전시회를 해볼까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그러한 부담 때문에 취소했었다고 털어 놓았다.

 

국내외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예술인들의 생활 또한 녹록치 않은 현실. 작가들은 어떻게 수익을 버냐는 질문에 김 화백은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했다. ‘Life is short, art is long(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 작가는 작품을 남기면 되는 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도 하루 밥 세끼 먹는 건 같다. 인생은 어떻게 살아왔냐가 중요한 것처럼 작가는 그림을 잘 그리면 된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예총 회장에 나올 때 했던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는 말을 늘 후배들에게 하고 있다는 그는 작가들은 주어진 운명대로 사는 거라고 했다.

 

문화예술의 본향 진도...그리고 많은 작가들

 

진도는 문화예술의 본향이나 다름없다.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80호로 지정된 운림산방은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小痴 許鍊)’이 살았던 곳이다. 소치 가문은 이후 5대에 걸쳐 13명의 화가를 낳았는데, 소치를 비롯해 2대 미산(米山) 허형(許瀅), 3대 남농(南農) 허건(許楗), 임인(林人) 허림(許林), 4대 입전(林田), 허문(許文) 등이다.

 

이러한 이유로 진도에서는 많은 작가들이 탄생했다. 진도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붓을 잡으면 누구보다 그림을 빨리 그리고, 북채를 잡으면 누구보다 북을 잘 치며 소리를 누구보다 잘 한다. 진도사람 몸에는 예술의 피가 흐르고 어릴 적부터 많은 작품들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이 베인다.

 

“여기(진도)에 온 분들은 진도에 예술인들이 많은 걸 보고 깜짝 놀랍니다. 멋을 있고 흥이 있고 가락이 있는 곳이 우리 진도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무형문화제들이 가장 많은 곳 진도. 여기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남도국립국악원이 있다. 김 화백은 “대단한 일”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진도예총은 지난 10월에 열린 진도시민의 날 행사에서 ‘국악의 향연’을 진행했다. 예산부족으로 초대 인사 초청을 고민하다 남도민요경창대회에서 대상 수상자들을 초청했다는 김 화백은 무엇보다 ‘명예로운 초대’였다고 말했다. 그가 예총회장일 때 만든 소치미술대전은 현재 미술협회로 넘긴 상태다.

 

“누가 만들었으면 어때요, 잘 꾸려가는 게 중요하지.”

 

김 화백은 우리나라에서 예술인들이 가장 고달픈 지역이 전남이라고 했다. 적은 예산에 많은 예술인. 뭔가 맞지 않은 구조다 보니 예술인들은 자신들을 어려운 생활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대(代)를 이어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대를 이을 작가가 없다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전시회를 열려고 해도 장소가 없어요. 목포예술회관이 전부인데 그나마 예약이 어려워서 작가들이 힘들어 하죠. 예술은 소중한 가치입니다. 우리가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문화유산입니다.”

 

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몇 개월간 목이 터져라 연습하는 연극배우들을 존경한다고 말한 김 화백은 “예술은 그냥 만들어 지는 게 아니라 영혼을 담았을 때 그 진가를 발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은 다 해봤는데 아직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못해봤다는 그는 한 때 천하통일을 꿈꾸던 그 꿈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가을 햇살이 창가를 벗어날 때까지 긴 시간동안 이어진 김용선 화백과의 인터뷰는 작가의 인생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게 했다.

 

MeCONOMY magazine November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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