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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동사나이 박정희 씨의 별난 인생스토리

평범한 삶보다는 드라마틱한 인생을 위해 지금껏 달려온 한 남자가 있다. 전 대통령 이름과 동명(同名)이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바꿔 살아야 했다. 사업에 성공해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다가 한순간 끝없이 추락해 망가진 삶 때문에 좌절감도 맛봤다. 그가 다시 제 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안동특산품판매장 사장이면서 노래하는 가수 박정희 씨를 만났다.

“나보고 그러더라고요. 이제 안동 사람 다 됐다고. 그러고 보니까 안동에 정착한 지도 벌써 12년 됐네요.” 한때는 유아독존(唯我獨尊)으로 살아온 그가 사업가로 변신한 건 운명 같은  인연 때문이었다. 20대부터 시작한 건축업이 거침없는 질주를 하더니 30대에 들어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야간업소를 3개나 운영하는 능력 있는 젊은 사장님이 그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적어도 추락하기 전까진 그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르던 겉멋은 이 세상 누구보다 최고라는 자만심을 갖게 했고 어지간한 것들은 시원찮게 보이도록 눈은 높아만 갔다. 어릴 적 꿈꿔온 ‘가수’의 꿈도 이때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서서히 용트림을 시작했다.

그 길로 충무로를 갔다. 당시 거기에 가면 노래 부르고 연극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한마디로 끼 있는 딴따라들이 넘쳤다. 그들과 얘기하고 노래 부를 때면 너무 행복했다. 사업도 잘되고,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는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젊은 사장님이었다.

“정말 일이 잘 풀렸죠. 거기다 하고 싶은 노래까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잠이 안 올 정도로 기분도 들떴고요. 세상이 다 내 것인 것 같은 착각에 빠졌던 것 같아요.”

이런 그에게 새로운 분야에 일할 것을 제안한 사람은 평소 알고 지내던 정치지인이었다. 충무로에서 알게 된 연예계 지인들의 도움으로 정치지인의 홍보를 맡게 된 것이다.

“아마 7년 정도 그런 생활을 한 것 같아요. 화려한 충무로 생활과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매력 있는 분야라는 생각이 들어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제가 한 번 꽂히면 ‘몰빵’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세상에 믿을 건 사람밖에 없다’는 소신으로 살아온 그였기에 지인에게 맡겼던 사업이 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기울 때까지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부도로 빚더미에 앉았다는 사실을 접했다.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엔 너무나 때가 늦어버려 손을 쓸 수조차 없었다. 지인이 운영을 잘했든 잘못했든 명백하게 대표자인 자신의 채무였고 졸지에 빚쟁이가 됐다.

“그때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어요.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었거든요. 성인이 되고 나서 한 번도 어려운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힘들더라고요. 그렇지만 죽을 용기도 나지 않았어요. 비겁한 자존심이 조롱했으니까요.”

그런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한 건 충무로 문화였다. 거기에 가면 괴로움도 사라졌다.

하루를 견디기 위해 찾았던 충무로가 그에게 새로운 삶의 목표를 부여했다. 과거 잠시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들을 따라 경로잔치에 가고 고아원에 봉사활동을 하러갔다. 가끔은 시골마을 같은 곳에 가서 위문공연 같은 것도 했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무대 위에 선다는 게 그에겐 유일한 삶의 의미였다. 그런 생활에 젖어 2년 쯤을 돌아다니던 중 허울뿐인 그를 새로운 길로 인도한 건 영화배우 조춘 씨였다.

“조춘 형님이 그러더라고요.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 어딜 가든 저를 꼭 데리고 갔어요. 덕분에 노래를 부를 기회도 더 많아졌죠. 조춘 형님 덕분에 영화에도 몇 번 출연했어요. 단역이긴 했지만요. 그런데 그때마다 ‘박정희’라는 이름이 걸렸어요. 대통령 이름과 같다고 영화에 출연할 때는 다른 이름을 써야 한다는 거예요. 조춘 형님이 저보고 ‘박춘’이라고 부르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자기 동생이니까 ‘박춘’이라는 이름이 좋겠다는 거죠.(웃음)”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기에 개명이 선뜻 내키진 않았지만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스크린 안 ‘박춘’의 영화배우의 생활은 그렇게 이어져갔다.


이것이 인생이다
충무로생활에 익숙해져 갈 때 안동에서 지인(정치하시던 분)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이제 그만 고생하고 여기로 와서 정착해보면 어때?’ 순간 고민했다.

‘이제는 명색이 연예인인데 시골에 내려가 산다고? 하지만 한편으론 시골에 내려가서 연예인대접 받으면서 살면 되지 뭐’ 하는 거만함도 고개를 내밀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안동으로 내려가 새롭게 미래를 개척해보자는 다짐을 했다.
이렇게 그의 안동행은 순탄해 보였다.

“안 될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더니 제가 그런 겪이였죠. 어렵사리 결정하고 내려갔는데 제가 몸담은 곳이 한 달 만에 문을 닫았어요. 죽고 싶더라고요. 사업에 실패하고 10여 년을 겉돌다 겨우 선택했는데 하늘이 너무 한다 싶었죠. 한 달을 같이 했던 동료들이 하나 둘 떠나고 남은 자리에 저와 사장님만 남았어요. 갈 곳도 없었지만 사업실패의 경험 때문에 힘들었던 과거를 생각하니까 사장님 곁을 떠날 수 없더라고요. 둘이서 힘을 합한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겠다는 야무진 용기도 생기더라고요.”

두 남자의 동거는 이렇게 시작됐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몸으로 때우는 일부터 밤업소에 나가 노래도 불렀다. 그러던 중 안동특산품 간고등어 장사를 생각했다. 저렇게 훌륭한 아이템이라면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겠구나 싶었다.문제는 주머니 사정이었다. 빈털털이 주제에 무슨 사업을 한단 말인가?

수소문 끝에 간고등어 본사 사장님이 새벽에 출근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른 새벽 무조건 회사 앞에 가 있다가 사장님이 출근하면 인사를 했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새벽의 칼바람이 옹색한 가슴을 후벼 파고 들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인사를 했다.

“아마 3개월 쯤 됐던 것 같아요. 사장님이 보자시더니 그러시더라고요. ‘자네의 끈기에 감동했네. 그 끈기로 사업 한번 해봐.’ ”
안동특산품 사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렵게 잡은 행운을 놓칠세라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했다. 하루 2~3시간 잠을 자고 그 시간조차도 아까워 시간을 쪼개 서울을 오갔다.

안동특산품이라고 안동에서만 팔 게 아니라 전국을 무대로 팔아보자고 판로를 전국무대로 넓히면서 개척을 시도했다. 서울에는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들이 많았다. 그들을 찾아다니며 안동특산품을 알리고 판매망을 넓혀갔다. 지인들도 그에게 용기를 줬다. 사업하는 지인들은 거래처에 안동특산품을 선물했다. 그렇게 한 군데 두 군데 판매처가 생기면서 안동에서 판매를 할 때보다 매출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때 몸에 무리가 왔다. 10m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휴식을 해야 한다며 입원치료를 권했지만 그런 여유가 아직 그에겐 없었다.

“그때 알았어요. 사업하시는 분들이 성공할 만하면 몸이 아픈 이유를. 몸이 부서져라 일하다 보면 사업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는데 몸은 엉망이 되는 거죠.”

안동특산품 판매장을 연 지 8년. 탁월한 사업수완으로 이제 그는 안동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통한다. 그 성공비결을 묻자 ‘진실함과 성실함’이라며 웃는다.

이젠 어딜 가나 안동사람으로 통하는 그도 한때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갈림길에서 갈등하던 때가 있었다.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함에서 비롯된 오해도 많았다.

“경상도 사람들은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요. 그냥 싫다는 선입견이요. 그래서 서로 가까워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더구나 말씨가 무뚝뚝하고 속내를 잘 털어 놓지 않다보니까 굉장히 힘든 부분이 많아요. 꼭 성질 낸 것 같다니까요. 한 마디 던진 말이 어떤 때는 염장을 지르는 것처럼 들릴 때도 있고요. 그런데 알고 보면 정말 진국이죠. 반면에 전라도 사람들은 약간 진보적이고 거친 면이 있어요. 속에 있는 말도 금방 털어 놓아 오해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전라도 사람들은 속을 털어 놓아야 빨리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앙큼한 여자’를 부르는 남자
박정희 씨는 안동에서는 꽤나 알려진 가수이다. 시간만 나면 무대를 누비며 노래를 부르는 그를 좋아하는 팬들도 생겼다. 그가 이끌고 있는 ‘사랑회’는 나눔과 노래가 함께 하는 따뜻한 봉사단체다. 순수친목단체로 출발해 현재 100여 명의 회원들이 함께 하는데 주말이면 고아원과 경로당 등을 찾아다니며 나눔을 실천한다.

박정희 씨는 여기서 회장직을 맡고 있다. 순수봉사단체 회원이라 다른 단체와 다를 바 없지만 경로잔치에서는 초대가수로 활동도 한다. 그의 노래 ‘앙큼한 여자’가 각종 케이블 방송과 라디오 등을 타면서 팬들도 제법 많이 생겼다.

“어떤 팬은 노래가 너무 좋아 눈물이 났다며 선물을 보내오기도 하고요. 40대 중년의 남성 팬은 노래가사가 자기가 떠나보낸 여자를 생각나게 한다며 직접 안동까지 저를 만나러 오기도 했어요. 이럴 때면 뿌듯하죠. 누군가에게 감동을 줬다는 것에 감사하고 제 노래를 들어준 것에 감사하고요.”

그가 가수의 꿈을 키워온 것은 아주 어린 나이인 초등학교 4학년 때이다. 당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를 따라 부를 때면 동네 어르신들은 노래를 잘 부르니까 커서 가수가 되라고 칭찬을 했다. 시골마을에 가끔 콩쿨대회가 열리곤 했는데 그럴 때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맨 앞자리에 앉아 구경을 했다.

“당시 그 사람들이 너무 멋져 보였어요.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멋진 옷을 입고 노래를 불러야지. 사실 그 꿈은 성인이 되고 사업을 할 때도 늘 가슴 속에 있었죠. 야간 업소도 어쩌면 그것 때문에 했던 것 같아요. 직접 나가서 노래를 부를 순 없었지만 손님이 없는 낮 시간에는 무대에 올라 늘 관중 없는 가수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내 이름이 박힌 노래 테이프를 내야지. 유명한 가수가 아니더라도 이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영원한 꿈이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당시 판을 하나 내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금액이 어마어마했거든요. 늘 현실이 아니라 꿈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죠.”

그의 노래 ‘앙큼한 여자’는 사연 있는 노래다. 아니 어쩌면 아픔이 있는 노래다. 한 순간도 잊지 못했던 아픈 과거가 그 노래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가 노래를 부르며 하는 제스처는 아픈 과거를 털어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래를 부르는 박정희. 그가 부르는 노래는 삶의 철학이 담겨 있는 노래다.


사업은 진실함이다
사업에 성공한 선배는 사업을 하려는 후배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을까? 

“99%가 노력이죠. 하지만 노력을 해도 안 된다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건 안 되는 이유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물론 주변에 좋은 분들과 인연이 돼야겠지만 저의 경우는 그 돌파구를 찾는 게 ‘진실성과 성실성’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끈기와 인내는 양념이죠.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성공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사업을 하면서 인내가 어느 정도 필요하냐면 고지를 앞에 두고 인내하는 사람은 성공하는 거고 못하는 사람은 실패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때론 즉흥적인 결정과 판단이 좋을 수도 있지만 사업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성공을 못하는 세 가지 약점이 있는데요. 머리가 아주 나쁘든가, 아니면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성질이 아주 못 됐든가 아니면 게으르든가 이 세 가지예요. 반대로 검소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하다면 사업에 성공할 수 있겠죠.”

그는 때론 바보처럼, 때론 천재처럼 순간의 처세술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스포츠맨이라서 성질이 거칠고 급했던 그가 지금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주변 분들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스스로가 낮아지려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몸에 배인 탓일까? 그는 한 순간도 가만히 앉아서 몸을 편안히 쉬지 못한다고 한다.

“지금도 잠시 짬이 나면 모자를 꾹 눌러쓰고 박스를 주워요.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모아 놓았다가 봉사활동을 갈 때 그 돈으로 아이스크림도 사 가고 학용품도 사가요. 평소 후원하는 것과 별개죠. 주머니에서 꺼내서 후원하는 것도 좋지만 이건 의미가 완전히 다르거든요. 주변 분들이 그러죠. 이젠 좀 쉬어가며 하라고. 하지만 제 몸을 움직이는 만큼 아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더 많이 번지니 어떻게 합니까.”(웃음)

2013년은 그에게 새로운 사업에 대한 도전이다. 한국의 정신력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가 준비하는 사업은 ‘제주도 흙돼지족발’사업이라고 한다. 토속적인 우리의 맛을 살려서 한국인의 건강을 책임지고 싶다는 야무진 꿈도 실천하고 싶단다.

“인생이 뭡니까? 서로 나누고 챙겨주는 거 아닙니까? 서로 진실 되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그 진실이 통하게 되고 따뜻한 세상이 되는 거죠. 요즘 젊은 분들은 인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잠시 해보고 성공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하나도 없어요. 남보다 더 노력하고 남보다 더 인내하고 남보다 더 끈기 있게 산다면 성공이 바로 그 사람에게 안긴다고 봐요. 저도 한때는 죽음을 택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고 했잖아요. 못난 생각을 반대로 뒤집으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자는 거거든요. 젊은 분들이 그런 용기 있는 삶을 살길 바라요.”

노래와 함께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해남의 땅끝 마을 소년은 어느덧 안동사나이가 되어 노래와 함께 멋진 인생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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