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자신의 정치적 무관심이 조금 낯설다. TV를 켜도 신문 기사나 휴대폰 뉴스를 봐도 정치 뉴스는 건너뛴다. 분노도 없고 기대도 없기 때문인데 관심이 사라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3분의 2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한 결과를 보면서 문득 그 압도적 숫자는 정당정치의 성취가 아니라, 더 이상 질문받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신호처럼 읽히는 것이었다. 동시에 내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낙선자를 지지한 사람들의 표가 사표가 되어 그들의 정치적 의사는 기록되지 않은 채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절대 다수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선거가 과연 민주적일 수 있을까? 다수의 승리가 곧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패배한 선택들이 제도 안에서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구조라면, 선거란 참여를 독려하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무력감을 학습시키는 과정이 되지 않는가 이런 회의가 들었다. 이대로 가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정치의 토대였던 ‘정당’ 시스템이 머지 않아 무너지고 말겠다는 예감도 스친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정당보다 더 나은 제도가 있다는 확신은 없다. 정당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핵심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더 이상 시민의 정치적 삶을 조직하는 중심축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은 분명하다. 거리 유세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환호와 야유가 교차하던 시절과 달리, 지금의 정치는 디지털 화면 속에서 소비된다. 참여는 클릭으로 대체되고, 선택은 알고리즘에 둘러싸인다. 그 결과 정치적 미래는 ‘선택의 확장’이 아니라, 무력감의 축적으로 다가온다. 보다시피 이미 사회는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행정은 관성처럼 작동하고 경제 역시 그렇다. 트럼프 미 대통령처럼 제도를 흔드는 인물이 등장해도 일상의 체감은 의외로 크지 않은 듯하다. 시장은 요동치지만 삶이 눈에 띄게 좋아지지도, 완전히 무너지지도 않는다. 리더가 있어도, 없어도, 세계는 정해진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정치는 과연 무엇을 바꾸고 있는가? 예전에는 정치가 사회의 방향을 결정했다. 지금은 정치가 이미 굴러가는 시스템 위에서 미세 조정만 하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뉴욕타임스 오피니언(2월 10일 자) 지면에 “그들은 서구를 지배했지만, 지금은 소멸해 가고 있다”는 안톤 예거(Aaton Jäger, 옥스퍼드대학교 정치학 강사)의 글을 읽어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1990년대 이후 서구의 정당들은 조직과 회원 기반을 잃어가며 영향력이 약해져 왔고 전통 정당 간의 경쟁이 시민의 정치적 선택과 연결되는 방식이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지금 세계는 SNS, 뉴스, 문화 소비까지 모든 것이 정치적 언어로 포장되고, 누구나 의견을 내고 논쟁이 끊이지 않지만 그렇게 떠들고 참여해도 실제 정책 변화나 삶의 개선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다시 말해 감정과 의견이 넘쳐나지만, 그것을 정치적 결과로 바꿔줄 정당의 역량이 진화하지 못했다고밖에 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정치적 발언은 넘치지만 정치적 효능감은 사라진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일부는 정치에서 등을 돌리는 건 아닐까. 분노하지 않기 위해서, 헛된 희망을 품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무관심은 방관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방어다. 이것이 더 이상 응답하지 않는 정치에 대한 솔직한 내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간) 일본과 체결한 통상·관세 합의에 따라 일본이 미국에 투자하는 첫 번째 프로젝트 3건을 발표했다. 이들 3개 프로젝트는 에너지·핵심광물 분야 사업으로 총 360억 달러(한화 52조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SNS 트루스소셜에 “일본과의 거대한 무역합의가 막 출범했다”며 “일본은 미국에 대한 5500억 달러(796조원) 규모 투자 약속의 첫 투자 세트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텍사스의 석유·가스(액화천연가스·LNG 수출 인프라), 오하이오의 발전(가스 발전소), 조지아의 핵심광물 관련 인프라 등 3개 프로젝트를 ‘전략 분야’ 투자로 제시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오하이오 가스 발전소에 대해 “역사상 최대 규모가 될 것”이라며, 텍사스 LNG 시설은 “수출과 미국의 에너지 패권을 이끌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지아 핵심광물 시설과 관련해서는 “외국 공급원에 대한 의존을 끝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발표에 앞서 일본은 지난 12일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산업상을 워싱턴DC에 파견해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 회담하는 등 ‘대미 투자 1호’ 안건을 논의해 왔다. 양국 간 회담이 끝난 뒤 공식 합의 발표는 없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게시글로 미뤄 추가 협상을 거쳐 합의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러트닉 상무장관은 이날 성명에서 “미·일 무역합의의 일환으로 일본이 약속한 투자 계획 중 첫 3개 프로젝트를 승인했다”고 밝혔다. 미 상무부는 “자본은 일본이 대고, 인프라는 미국에”라는 취지로 설명하며, 해당 투자 모델이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의 대미 투자 전략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화이트해커(White Hacker)가 기업·기관의 보안 취약점을 합법적으로 발견해 신고하는 ‘취약점 신고·조치·공개제도’가 올해 정부 시범사업으로 도입된다. 화이트해커란 악의적 해킹을 막기 위해 해킹 기술을 선한 목적에 사용하는 보안 전문가를 의미한다.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는 최근 국무회의에 인공지능(AI)액션플랜 세부 내용을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르면 정부는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AI 기반 사이버 위협 등에 대응해 선제적·상시로 보안 취약점을 발굴·제거하는 제도를 올해 시범적으로 시행하기로 했다. 현행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보통신망법)이 정보통신망 침입을 원천 금지하며 해킹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선의의 목적으로 취약점을 탐색하는 화이트해커 활동까지 불법으로 규정하면서 제도 보완 필요성이 지적돼 왔다. 사이버 보안업계에서는 지난해 대규모 해킹 사고가 잇따라 터지면서 화이트해커가 기업 계약 등 보호막 없이도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다고 제안해 왔다. 지난해에는 쿠팡 3370만명 개인정보 유출, SK텔레콤 유심(USIM) 서버 해킹으로 2696만명 피해, 롯데카드 297만명 카드정보 유출, 넷마블 611만명 및 휴면계정 3100만건 개인정보 유출, 업비트 445억원어치 암호화폐 탈취 등 통신, 플랫폼, 금융, 게임 등 거의 모든 산업군에서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다수의 언론에서는 ‘2025년은 해킹의 한 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미국 국방부와 사이버보안국(CISA) 등은 취약점 제보 프로그램(VDP)을 운영하며 화이트해커가 정부 시스템의 보안 약점을 찾아 제보할 때 법적 처벌 걱정 없이 활동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미국은 보안 취약점을 신고하는 사람에게 포상금을 지급하는 ‘버그바운티 제도(bug bounty program)’도 활용된다. 구글, 애플 등 글로벌 빅테크나 공공 분야에서 버그바운티로 화이트해커의 참여를 촉진하고 적극적인 보상에 나서면서 사이버 공격 방어 생태계를 키우고 있다. 국가AI전략위는 240만명이 가입한 화이트해커 플랫폼 ‘해커원’ 등과 논의를 거쳐 민간 화이트해커를 활용한 선제적·상시 보안 점검 체계 도입 방안을 구체화했다. 이에 따라 미국·유럽연합(EU)의 취약점 신고·조치·공개 제도를 참고해 도입하는 로드맵을 다음 달까지 마련할 계획이다. 이후 올해 시범사업을 진행한 뒤 내년에는 법·제도 개선을 추진할 계획이다.
미국이 중재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안을 논의하는 3자 협상이 17일(현지시간) 시작됐다고 AFP(Agence France-Presse, 프랑스 통신사)·로이터통신 등 외신이 보도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2022년 2월 중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전면전으로 확산됐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이번 협상은 18일까지 이틀간 계속된다. 협상은 앞서 지난달 23~24일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에서 시작된 뒤로 세 번째 열리는 3자간 협상이다. 미국 측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중동특사 스티브 윗코프(Steve Witkoff)와 백악관 선임고문을 역임한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가 참석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각각 군 수뇌부가 참석해 영토 문제와 휴전안 등을 논의한다. 이번 협상의 최대 관건은 양측이 대립하는 영토 문제에서 진전사항이 있을지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동부 돈바스 지역인 도네츠크(Donetsk)와 루한스크(Луганськ)주를 넘기라고 지속해서 요구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는 영토 문제는 물러설 수 없는 레드라인이라며 맞서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측은 영토 문제에서는 강경한 입장인만큼 당장 종전 협상까지 확정하는 등 현재 장기화된 전쟁의 평화적인 종료 돌파구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이 압도적이다. 그리고 이번 협상에서는 러시아가 미국에 제안한 12조 달러(한화 약 1경7600조원) 규모의 경제 협력 방안 등도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종전 협상 시한을 오는 6월까지로 제시하고 양측을 계속해서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양국간 종전 압박 이유는 전쟁 장기화에 따른 부담 증가, 트럼프 행정부의 성과 중심 외교, 미국 내 정책 호선 해소 필요, 러시아와의 관계 재정립 시도, 우크라이나의 안보 보장 문제 등에서다. 미국은 오는 11월 대통령 중간선거를 치른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기자들과 만나 우크라이나 측에 신속히 종전 협상 테이블에 나올 것을 재촉하기도 했다.
◇교육적 이상과 현실적 한계 사이의 정직한 성찰 2025년 9월 19일, 일본 문부과학성 중앙교육심의회가 발표한 국가 교육과정의 차기 학습지도요령 논점 정리(안)는 일본 공교육이 지난 수십 년간 추구해 온 ‘질적 향상’ 담론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문서로 평가받고 있다. 이 논점 정리는 새로운 교육 목표를 제시하기에 앞서, 그동안 일본의 교육개혁이 누적시켜 온 구조적 피로(structural fatigue)를 정책 문서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일본 교육은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주입식 교육에서 탈피해 학생들의 학업 부담을 줄이고 창의력과 인성을 기르고자 이른바 ‘유토리(여유)’ 교육정책을 도 입하였다. 이름처럼 학습 내용을 감축하고 주 5일제 수업 등을 도입했으나, 결과적으로 학력 저하 논란이 발생하여 실패한 정책이라는 평가도 받아왔다. 이후 ‘탈(脫) 유토리’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기초 학력의 확실한 정착과 미래 사회에 대비한 역량 교육을 동시에 달성하고자 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는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는 전혀 다른 신호 들이 포착됐다. 교사의 번 아웃과 장시간 노동, 그리고 부등교 학생 수의 급증은 더 이상 개별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위기의 징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깊이 있는 배움’을 가능하게 하는 세 축의 재배열 이러한 맥락 속에서 아래 그림은 일본 차기 학습지도요령 (국가 교육과정) 개정 논의의 기본 관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중앙에 배치된 핵심 문구는 “다양한 아이들의 ‘깊이 있는 배움’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는 이번 개정이 특정 학생 집단이나 수월성을 위한 교육과정이 아니라, 모든 아이가 각자의 조건 속에서 깊이 있는 학습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 설계를 목표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 중심 목표를 둘러싸고 세 개의 축이 삼각 구조로 배 치되어 있는데, 각각 Excellence(깊이 있는 배움의 실현), Equity(다양성의 포용), Feasibility(실현 가능성의 확보)를 의미한다. 주목할 점은 이 세 요소가 병렬적으로 나열된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학생이 평생에 걸쳐 주체적으로 배우고, 다양한 타자와 협력하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 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한 민주적이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시민적 역량의 형성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Excellence는 단순한 학업 성취의 고도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깊이 있는 배움은 2017년 개정 교육과정에서 제시된 액티브러닝적 방향, 즉 ‘주체적·대화적·깊이 있는 배움’ 이라는 세 요소 가운데서, 특히 ‘깊이’의 차원을 재 강조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학습 방식의 활성화 자체보다, 그러한 활동이 학습자의 이해를 어떻게 구조화하고 삶과 사회에 어떤 의미를 남기는가에 정책적 초점을 이동시킨 결과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활동의 ‘형태’가 아니라 배움의 ‘질’을 교육과정 개정의 중심에 놓겠다는 선언이 다. Equity는 이러한 깊이 있는 배움이 일부 학생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담고 있다. 학습 속도, 언어 환경, 장애 유무, 가정 배경 등 아이들의 조건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전제로, 교육과정은 획일적 기준이 아니라 유연한 접근과 조정 가능성을 내장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이 축은 ‘동일한 교육’이 아니라 ‘동등한 도달 가능성’을 지향하는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 개정 논의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화로 읽히는 것이 바로 Feasibility다. 그림에서 실현 가능성이 별도의 축으로 명시된 것은 “아무리 고결한 교육적 목표라 하더라도, 현장의 물리적 시간과 교사의 수용 능력을 초과하는 순간 그것은 정책이 아니라 이상에 불과하다”는 현실적 반성에서 출발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즉, 차기 개정안의 본질은 “무엇을 더 가르칠 것인가”라는 확장의 논리에서 벗 어나 “어떻게 교육 체제를 지속 가능하게 재구조화할 것인가”라는 공교육의 생존 전략을 제도적으로 공식화한 데 있다. 이는 교육개혁을 ‘더하는 기술’이 아니라, 무엇을 덜어내고 재배치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으로 전환시키는 시도라 볼 수 있다. ◇초·중학교의 혁신: ‘조정수업시수제도’가 창출하는 여백 지금까지 일본의 초·중학교는 국가가 정한 ‘표준 수업 시 수’를 엄격히 준수해야 하는 경직된 제도 아래 운영되어 왔다. 이러한 체제는 전국적인 교육 수준의 균질화를 보장하는 장점이 있었지만, 동시에 교사에게는 끊임없는 진도 압박을, 학생에게는 수업을 ‘따라가야 할 과제’로 인식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족쇄로 작동해 왔다. 이 구조를 근본에서 흔드는 장치가 바로 ‘조정수업시수제도(調整授業 時数制度)’다. 이 제도는 학교가 연간 표준 수업 시수의 약 10% 범위를 자율적으로 감축하고, 이를 ‘재량적인 시간 (Margin)’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제도가 단순한 시수 감축이나 규제 완화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확보된 이 ‘여백’은 학습 결손이 있는 학생을 위한 개별 맞 춤형 지도, 지역 사회의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한 심화 탐구, 프로젝트형 학습, 그리고 교사들이 수업의 질을 높이기 위해 공동으로 연구하고 성찰하는 시간으로 재배치된다. 다시 말해, 여백은 교육 활동의 공백이 아니라, 기존의 획일적 시간 구조 속에서는 불가능했던 질적 심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차기 개정안의 방향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여백이 없으면 깊이도 없다”는 표현은 단순한 수사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교육의 질을 교사의 헌신이나 추가 노동에 의존하지 않고, 제도적으로 확보된 시간 위에서 실현하겠다는 정책적 선언이다. 교육의 혁신을 ‘더 열심히 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가능한 구조를 먼저 만들겠다’ 는 방식으로 전환한 점에서 이 제도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고등학교 단위제의 유연화: ‘이수 면제’와 학교 밖 배움의 통합적 설계 이러한 일본 정부의 방향성은 고등학교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등학교 단계에서의 개혁은 초·중학교보다 한층 더 과감한 자율성을 지향한다. 논점 정리는 고등학교 교육을 더 이상 ‘학교라는 물리적 공간’에 가두지 않고, 사회 전체를 하나의 배움의 네트워크로 확장하는 것을 명확히 목표로 삼고 있다. 그 핵심 장치가 바로 ‘단위제 유연화’와 ‘이수 면제(Credit Waiver)’ 제도다. 이 제도는 학생이 입학 전이나 학교 외부의 학습 경험을 통해 특정 과목의 목표를 이미 달성했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경우, 해당 과목의 수강을 면제하고 그 시간을 상위 수준의 심화 학습, 대학 강의, 기업 인턴십, 사회 연계 프로젝트 등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단순히 ‘선행 학습을 인정해 주겠다’는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학습의 경로가 학교 안에서만 형성된다는 전제를 해체하고, 학교 밖 배움을 정식 교육과정의 일부로 통합하려는 구조적 전환이다. 더 나아가 필수 과목의 핵심 내용을 학교가 자체적으로 설계한 ‘특성화 탐구 과목’ 속에 통합하여 운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학생들은 입시를 위한 중복 학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로와 관심에 맞춘 커리큘럼을 실질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토대를 갖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고등학교를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내용을 제공하는 공간’에서 학습 경로를 조정·연결하는 허브로 재정의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한·일 교육과정의 비교 분석: ‘제도적 인프라’와 ‘구조적 탄력성’의 차이 유사한 인구 절벽과 디지털 전환이라는 과제를 공유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교육과정 개혁은 접근 방식에서 흥미로운 대조를 보인다. 한국의 ‘2022 개정 교육과정’이 고교 학점제라는 강력한 제도적 틀을 중심으로 학생의 과목 선택권을 확대하는 방향이었다면, 일본의 ‘차기 개정안’은 운용의 탄력성과 현장의 지속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래 표는 한국과 일본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핵심 개정 내용을 비교한 것이다. 한국이 학생 자율성에 초점을 둔 ‘과목 선택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데 중심을 두었다면, 일본은 배움의 ‘인정 범위’를 학교 밖으로 확장함으로써 교육과정의 밀도를 낮추는 방식을 택했다고 생각한다. 이 비교는 어느 쪽이 더 우월한지를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국이 공교육의 지속 가능성이라는 동일한 표준 수업 시수 자체의 유연화 과제에 대해 서로 다른 경로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지능적인 여백’의 설계 일본의 2026년 교육개혁은 우리에게 하나의 단순하지만 무거운 명제를 던진다. 좋은 교육은 지속 가능한 구조 위에 존재한다. 우리는 그동안 미래 역량이라는 이름 아래, 교육 현장에 새로운 과업을 끊임없이 덧붙이는(Add-on) 방식의 개혁만을 반복해 온 것은 아닐까. 일본이 제시한 Feasibility(실현 가능성)는 정책이 갖춰야 할 가장 용기 있는 덕목이다. 교사가 진도 압박에 시달리고, 아이들이 정 답만을 쫓는 교실에서는 ‘깊은 배움’도 ‘다양성’도 뿌리내리기 어렵다. 일본이 설계하기 시작한 ‘여백’은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교사가 아이의 눈을 맞출 수 있는 시간이며, 아이들이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지능적인 여유다. 이제 우리 교육 역시 “무엇을 더 가르칠 것인가”라는 유혹을 내려놓고, 공교육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무엇을 과감히 덜어낼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글 현재균 교육학박사(쓰쿠바대학 특임연구원)
강대국 정치가 익숙한 양상으로 돌아왔다. 미국, 중국, 러시아는 지역, 무역로, 정치적 동맹에 대한 특권적 주장을 다시금 내세우고 있으며, 종종 냉전 이후 시대를 규정해야 했던 법적 제약을 교묘하게 이용하거나 회피하고 있다. 지난 세기의 강요된 위계질서에 의해 형성된 국가들, 이를테면 인도, 브라질과 같은 국가들은 다양한 수준의 점령, 지배, 또는 외부의 제약을 경험해 왔다. 이들 국가는 통치 방식, 안보 문제, 개발 전략에서 깊은 분열을 겪고 있지만, 지배와 저항이라는 공통된 역사를 통해 다져진 정치적 문법을 공유하고 있다. 이 문법은 힘들게 쟁취한 자산이며, 쉽게 위협받을 수 있는 것이므로 이들은 필사적으로 지켜내려고 할 것이다. 대륙을 넘나들며 동맹을 맺기보다는 양다리를 걸치고, 확고한 결단을 내리기보다는 상황을 살피고, 굴복하기보다는 거래적인 방식으로 협상하려 할 것이다. 또한, 무역을 다변화하고, 자금 흐름을 바꾸고, 대안적인 파트너를 발굴하며, 선택의 폭을 넓히고 그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리라. 이들에게는 공급망, 결제 시스템, 에너지 흐름, 데이터 네트워크, 식량 시장 등 모든 요소가 압력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차기 세계 질서는 아마도 안정적인 강대국 연합이나 세계가 대립하는 진영으로 깔끔하게 나뉜 모습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오히려 더 거칠고, 즉흥적이며, 경쟁이 치열한 양상을 띨 가능성이 높다. 강대국들이 경계를 그으려 애쓰는 한편, 과거의 위계질서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들 국가가 끊임없이 그 경계를 시험하고, 변형시키고, 재협상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무대에 오르되 단독 주연이 아니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 무대에 설 것이라는 전망에는 이견이 적다. 다만 그 방식은 기존 패권국과 다르다. 중국은 군사력보다는 경제력, 기술력, 인프라 투자와 금융을 통해 영향력을 확장해 왔다. 다만 중국 역시 내부적으로는 인구 감소, 부동산 위기, 성장 둔화라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부상은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 권력이기보다는, 기존 질서를 계속 흔드는 결정적 변수에 가깝다. 이는 세계가 하나의 중심을 갖기보다는 여러 축이 충돌하는 상태로 장기간 머물 가능성을 시사한다. 18세기에 중국과 러시아는 근시안적으로 유라시아 스텝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애썼고, 영국은 증기기관을 완성하며 세기의 승자가 되었다. 19세기에는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 분할에 몰두하는 동안 미국은 전력화와 대량 생산을 발명하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현재 미국은 베네수엘라를 통치하고 그린란드를 차지하려 애쓰면서 스스로 주의를 분산시킬 위험에 처해 있는 반면에 중국은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에서부터 양자 컴퓨팅과 생명공학에 이르기까지 미래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중국의 경제 규모는 구매력 기준으로 이미 미국의 약 30%에 달하며, 산업 기반과 발전량은 각각 두 배에 이른다. 전기 자동차와 차세대 원자력 발전소 같은 신기술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데 미국은 항생제부터 희토류 광물까지 모든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러니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을 장악한다고 해서 눈앞의 현실을 크게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서반구는 세계 인구에서 약 13%만을 차지하고 있지만 제조업 생산 능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만약 아메리카 대륙을 우선시하고 아시아에 대한 자원 투입이 감소한다면, 이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경제적으로 역동적인 지역을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내주는 결과를 초래하는 어리석은 선택일 것이다. 미국이 중국의 막대한 규모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국내 군사력을 재정비하고 해외에서 "동맹 규모"를 구축함으로써 미국의 파트너 국가들의 집단적 힘을 활용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서반구에 대한 "미국 우선주의" 집착은 이러한 노력을 복잡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덴마크로부터 그린란드를 강탈하려는 것은 나토를 분열시키고 유럽을 중국에 더 가깝게 만들 수 있는 빌미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혼돈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가 된다 전문가들의 전망이 가장 냉혹해지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앞으로의 세계는 점차 안정될 것이라는 기대보다, 혼돈이 상수가 되는 시대에 가깝다는 것이다. 규칙은 약해지고, 위기는 잦아지며, 충돌은 국지적으로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10년 동안 많은 사람은 똑같은 미래가 반복되는 것에 싫증을 느꼈다. 빠르게 움직이고 기존 질서를 부수거나, 적어도 뒤흔드는 걸 대담하고 급진적이며 참신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런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가 익숙해져 버린, 돌이켜보면 안일함에 빠질 정도로 익숙해진 국제 질서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다음엔 트럼프 미 대통령이 또 다른 국가 원수를 억류하라고 명령할까? 또 다른 러시아 국적 유조선을 나포할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대만을 중국 본토와 재통일할 때가 왔다고 결정할까? 우리는 이른바 급진적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전 체제가 무너지고 있는 과도기에 있지만, 앞으로 무엇이 올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 않고 곧 새로운 정상 상태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예측 불가능한 유권자, 무역 전쟁, 인공지능(그리고 그에 따른 투자 거품), 고령화, 지구 온난화 등 너무나 많은 파괴적인 요인들이 존재한다. 게다가 우리는 의사결정권자들의 변덕에 무척 취약하다. 기념비를 세우는 데는 열심이지만 국민에게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고 번영을 가져다주는 데는 서툰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항상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게 해주는 측근들로 둘러싸인 고립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그리고 대부분 지표에서 여전히 세계 최강대국의 지도자이지만 국내외에서 권력 행사를 즐기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생각해 보시라. 대만과 태평양을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갈등, 국경을 따라 형성된 인도와 중국의 충돌, 그리고 유럽과 러시아의 동부 국경에서의 충돌 등등 전쟁은 우연히 시작될 수 있지만, 일단 시작되면 통제하거나 끝내기가 어렵고, 마치 산불처럼 모든 걸 집어삼킬 것이다. ◇한국 경제는 이 혼돈 속에서 무엇을 감당해야 하나 한국은 에너지와 자원을 거의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국가이며, 무역 의존도가 높은 전형적인 개방 경제다. 세계 질서가 흔들릴수록 한국 경제는 그 진동을 증폭된 형태로 받아왔다. 에너지 전환 경쟁은 한국 산업의 명암을 동시에 드러낸다.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조선과 같은 분야에서는 기회가 열리지만, 에너지 가격 변동과 공급망 재편은 제조업 전반의 비용 구조를 위협한다. 미·중 갈등은 ‘선택의 문제’를 한국 앞에 던지고 있으며, 어느 한쪽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리스크로 돌아올 것이다. 특히 기술 표준, 공급망, 안보와 산업 정책이 한 덩어리로 묶이는 시대에 한국 경제는 보다 명확한 방향성과 내부 체력을 요구받고 있다. 성장률보다 중요한 것은 구조적 회복력이고,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성이다. 혼돈의 시대를 산다는 것은 불안하지만, 동시에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혼돈을 단순한 위기의 연속으로만 보지 않고, 무엇이 구조적으로 바뀌고 있는지를 읽어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규칙이 사라진 자리에 어떤 원칙을 세울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한국 경제의 미래를 가를 것이다.
미국과 이란이 17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이란 핵 프로그램 문제를 둘러싼 협상을 시작했다. 이번 협상은 미국이 이란을 겨냥해 중동에 군사력을 집결하고, 이란은 미사일 발사를 포함한 대규모 해상 훈련을 시작하며 긴장이 높아진 가운데 열렸다. 로이터 등에 따르면 미국과 이란이 제네바에 있는 유엔 주재 오만 대사관 관저에서 간접 협상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놓고 갈등을 빚어오던 양국은 지난 6일 오만에서 협상을 재개한 바 있다. 로이터는 소식통을 인용해, 이란은 아바스 아라그치 외무장관이 협상단을 이끌고,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특사인 스티브 윗코프와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가 참가한다고 전했다. 이란 국영방송은 양측이 오만의 중재자들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간접적으로 협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일 전용기에서 기자들과 만나 “자신도 간접적으로 협상에 관여할 것”이라며 “합의를 못할 경우의 결과를 이란 측이 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란 인근 해역에 미국 핵항공모함이 배치된 가운데 로이터 통신은 익명의 미국 관리를 인용해 미군이 몇 주에 걸친 대이란 작전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란 반관영 타스님 통신도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해군이 원유 수송 핵심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에서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는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미국 대통령은 최근 연설에서 47년간 미국이 이란을 파괴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고 했다”며 “당신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3일 이란 정권 교체가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라며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미국과 이란이 적대 관계를 이어왔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란은 이번 협상을 통해 핵 프로그램을 둘러싼 양국 간 이견을 좁힐 가능성도 기대하고 있다. 에스마일 바가이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앞선 오만 회담을 두고 “이란 핵문제에 관한 미국의 입장이 보다 현실적인 쪽으로 움직였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가 최근 발행한 웹진 ‘소프트웨어 중심사회’의 주요국 AI 인재 양성 및 유치 정책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인재 유치 매력도는 2020년대 들어서도 세계 30~40위권에 그치고 있다. 이 지수는 AI 분야에 한정한 것이 아닌 전반적인 분야의 고급 인력 유치·유출에 관한 지표라고 하더라도 AI 분야 인재에 적용해 보더라도 단기간에 상위권 진입은 쉽지 않을 것이 전망됐다. AI 분야 인재 이동을 분석하는 미국 스탠퍼드대 인간중심AI연구소(HAI)가 발행한 ‘AI 인덱스’의 지난해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한국 AI 인재 이동 지수는 -0.36(10만 명당 0.36명 순유출)으로 2023년 -0.30에서 유출 폭이 더 커졌다. 보고서는 지난해 정부가 관계 부처 합동 외국인정책위원회에서 글로벌 최우수 인재를 유치해 AI 등 첨단 산업을 지원하기로 하는 등 최근 들어 AI 고급 인재 ‘모시기’에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고 소개했다.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AI) 분야 고급 인재 확보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점이 됐다. 우리나라는 특히 AI 인재 순유출국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인재 보상 격차 해소와 경직된 연구 문화 개선을 통한 순유입국 전환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AI 양강으로 전 세계 인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미국·중국 외에 AI 인재 순유입국인 영국·일본의 사례가 시사점을 주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 보고서는 “한국은 대학 중심의 국내 인재 양성 정책에 주력하고 있으나 석·박사급 고급 인재 풀의 규모가 아직 선도국에 비해 작고 해외 인재 유치·귀환·활용 및 글로벌 협력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미흡하다”고 진단했다. 미국 빅테크나 해외 연구기관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AI 전문가들이 다수 있지만, 이들이 역량을 국내에서 발휘하거나 귀국하도록 하는 정책적 장치는 부족한 실정이어서다. 보고서는 또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글로벌 인공지능 파트너십(GPAI)’ 등 거버넌스 논의에 참여하지만, 정책적으로 국제 공동연구나 인재 교류가 미흡하고 기업의 AI 인재 확보에 어려움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는 민관 협력을 확대하고 있지만, 아직은 초기 단계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AI 인재 순유입국 지위를 유지 중인 영국과 일본이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다고 지목했다. 해외의 사례를 살펴봤을 때 영국은 글로벌 재능 비자, 세계 상위권 대학 졸업생을 위한 HPI 비자, 스케일업 비자 등 다양한 비자 제도를 통해 브렉시트 이후 해외 AI 인재 유치에 힘쓴 결과 안정적인 AI 인재 순유입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은 AI 인재 양성의 후발주자로 2019년까지 한국처럼 AI 인재 순유출국이었지만, 2020년 0.69로 순유입국으로 전환했다. 일본은 특별고도인재제도(J-Skip) 도입, 유럽연합(EU)과 AI 인재 상호 유학 촉진 프로그램 및 대상국 확장 등을 통해 해외 인재 유치와 함께 해외 우수 일본인 과학자 귀국에도 힘쓰고 있다. 보고서는 국내 석·박사급 고급 인재에 대한 파격적인 보상 체계와 혁신 연구 클러스터 조성, 외국인 인재의 안정적인 정주 환경을 마련하는게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이와 함께 물리적인 이주 없이도 국내·외 AI 고급 인재가 국내 산업에 기여할 수 있는 원격 협업 및 인재 네트워크를 활성화해야 한다고도 제언했다.
글로벌 인공지능(AI) 열풍이 의약계로 확산하면서 국내 의료 AI 기업들의 실적이 큰 폭으로 개선됐다. 이 같은 흐름은 AI 이용이 급격하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올해는 흑자로 전환하는 기업들이 속속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16일 의료 AI업계에 따르면 의료 AI기업 루닛(Lunit)은 작년 연결재무제표 기준 매출이 831억원으로 전년도 542억원보다 53% 급증하며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루닛 매출은 2021년 66억원 이후 4년 연속 증가하며 12.6배로 성장했다. 뷰노(Vuno)도 작년 매출이 348억원으로 전년보다 34.4% 늘어나며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뷰노는 2022년 83억원 이후 3년 연속 매출 증가세를 보였다. AI 기반 희귀질환 진단 기업 쓰리빌리언도 작년 매출 117억원으로 103% 급증했다. 쓰리빌리언은 2022년 8억원에서 2023년 27억원, 2024년 58억원 등으로 3년 연속 매출 2배 이상 올랐다. AI 기반 혈액 및 암 진단 전문기업 노을은 작년 매출이 51억2000만원으로 전년보다 319% 급증했고 제이엘케이는 33억5766만원으로 135.2%가 성장했다. AI 의료기기 등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큰폭으로 증가하면서 의료 AI기업의 매출이 오르고 있다. 쓰리빌리언은 전장엑솜(WES) 및 전장유전체(WGS) 기반 진단 검사 수요가 글로벌 전역에서 확대된 데다 지난해 출시한 AI 유전변이 해석 소프트웨어 ‘GEBRA(제브라)’가 글로벌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모델로 시장에 안착했다고 설명했다. 노을은 작년 상반기 판매 지역이 아프리카에 85%나 편중됐지만 글로벌 혈액검사(CBC) 장비 제조사 니혼코덴 멕시코, 유럽 대표 의료기기 유통사 바이오메디카, 독일 1위 진단 랩체인 림바크 그룹에 납품하는 등 중남미(62%), 유럽(15%)으로 다변화되며 판매 단가와 매출 총이익률이 증가했다고 전했다. 매출이 증가하는 가운데 영업흑자를 기록하는 기업도 나타나고 있다. 웨어러블 AI 진단 모니터링 기업 씨어스테크놀로지는 지난해 163억3000만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해 처음으로 흑자 전환했다. 국내 증시에 상장된 의료 AI기업 중 연간 흑자를 달성한 기업은 씨어스테크놀로지가 처음이다. 씨어스테크놀로지는 매출도 전년 대비 495% 급증한 481억7000만원을 냈다. 올해는 흑자 전환하는 의로 AI기업이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AI 의료기기 등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고 국내 기업들의 기술력도 한층 고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루닛은 올해 매출은 늘리고 비용은 줄이는 재무 전략을 통해 연말 현금영업이익 기준 흑자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올해 매출이 전년 대비 40~50% 증가하고, 비용은 인력 15% 감축과 비용 효율화를 통해 20% 감소할 것으로 루닛은 예상하고 있다. 작년 영업손실이 49억원으로 전년보다 60.8%(76억원) 급감한 뷰노도 흑자 전환 가능성이 엿보인다. 의료 AI 업계 관계자는 “올해 의료 AI 업체들의 매출 증가세와 비용 감소세가 뚜렷해질 것”이라며 “흑자 전환하는 기업들이 올해는 꾸준히 나타나며 의료 AI업계 생태계가 본격적으로 조성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병오년(丙午年) 설 당일인 17일 국민들에게 명절 인사를 전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설 명절 영상인사에서 “거리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이 나라를 지켜내주신 모든 주권자 국민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 한해는 국민 여러분께서 힘을 모아주신 덕분에 모든 것들이 예상보다 빠르게 제자리를 찾고 있다"고 강조한 뒤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생각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은 “가족과 이웃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다르지 않고 청년과 어르신이 바라는 바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면서 “병오년 설 명절 아침, 모든 국민을 아우르고 섬기는 ‘모두의 대통령’으로서 다짐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민께서 원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이정표 삼아 한 걸음 한 걸음 흔들림 없이 걸어가겠다”며 “지난 한 해, 서로를 격려하며 어려움을 이겨낸 것처럼, 새해에도 우리 사회가 따뜻한 연대와 신뢰 위에서 함께 나아가길 소망한다”고 덧붙였다.
오는 4월로 예정된 워너브러더스(이하 워너) 주주총 회는 단순한 기업 이벤트가 아니다. 이 총회는 영화를 누가 만들고 누가 지배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만약 넷플릭스가 주도하는 워너 인수가 현실화한다면 할리우드의 제작 구조가 송두리째 바뀌는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과연 영화는 산업인가? 문화인가? 할리우드의 100년 역사의 분수령이 될 인수합병 시나리오를 통해 할리우드의 미래를 앞당겨보고자 한다. 인수 가능성이 높은 3가지 이유 현재 시장 데이터와 업계의 기류를 바탕으로 전문가들은 넷플릭스의 인수안이 통과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우선 넷플릭스는 최근 인수 자금 827억 달러(121조6500 억원)에 인수하되 ‘100% 전액 현금’으로 하겠다고 제안해 주주들의 불안을 완전히 해소했다. 주식 시장의 변동성에 노출되지 않고 주당 27.75달러를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데 이는 기존 투자자들에게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두 번째, 워너 이사회는 이미 만장일치로 넷플릭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경쟁사인 파라마운트의 제안을 “위험하고 충분하지 않다”면서 넷플릭스에 찬성표를 던질 것을 권고하고 있다. 세 번째, 주주들은 현금을 받을 뿐만 아니라, 분사(分社) 되는 CNN·디스커버리 채널의 주식을 챙길 수 있다. '현금 대박'과 돈이 되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새 회사 지분'을 동시에 챙기는 구조라 반대할 명분이 약하다. 그렇지만 긴장을 늦출 상황도 아니다. 넷플릭스와 인수전 에 뛰어든 파라마운트사가 스카이댄스와 연합해 ‘위임장 대결(Proxy Fight)’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에 우호적인 지금의 워너 이사진을 갈아치우고, 자신들의 입 맛에 맞는 이사들을 앉히려 하고 있다. 동시에 “넷플릭스 가 워너를 인수하면 할리우드의 창의성이 죽는다”는 논리로 소액 주주들과 창작자들의 감성을 공략하고 있다. 문제는 4월 주주총회 이후다. 규제 당국인 미 법무부는 지난 16일, 이번 인수에 대한 심층 조사에 착수했다. 넷플릭스가 스트리밍 시장을 독점하고 구독료를 올릴 것을 우려하는 정치권의 목소리가 크기 때문이다. 미 정부는 인수를 허가하되 특정 자산(예를 들어 HBO Max 일부 서비스 등)의 매각을 요구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거래의 규모가 축소될 가능성도 있다. ◇ 왜 하필 워너브러더스인가? 워너브러더스는 단순한 스튜디오가 아니다. 할리우드의 역사다. 《카사블랑카》에서 《대부》, 《해리포터》, 《다크 나이트》에 이르기까지 영화란 무엇인가를 규정해 왔다. 또한, 극장 중심의 배급, 스타시스템, 감독 중심의 제작 문화를 제도화했다. 반면 넷플릭스는 이 모든 질서를 우회해 성장했다. 극장을 거치지 않고 편성표 없이 시청자의 선택과 데이터에 따라 콘텐츠를 공급했다. 넷플릭스가 워너를 인수한다는 것은 할리우드의 오래된 엔진에 새로운 운영체제를 이식하는 일이다. ◇ 넷플릭스의 진짜 목표 이번 인수의 핵심은 극장도, 제작 인력도 아니다. 지식재산 권(IP)이다. 워너가 보유한 방대한 라이브러리(DC 유니버스, 해리포터 세계관, 클래식 영화 아카이브)는 넷플릭스가 갈망하는 자산이다. 지금까지 넷플릭스의 약점은 분명했다. 히트작은 많았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신화가 부족했다. 그래서 넷플릭스가 워너를 품는 순간 콘텐츠 경쟁은 누가 더 많이 만드느냐가 아니라, 누가 세계관을 소유하느냐의 싸움으로 이동한 다. ◇ 파라마운트의 방어적 인수 시나리오 이 인수가 현실이 될 때 가장 먼저 흔들릴 곳은 파라마운트사다. 이미 시장에서는 적대적 인수를 막기 위해 파라 마운트가 다른 스튜디오, 혹은 빅테크와 결합하는 등 선제적 합병을 준비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규모를 키우지 않으면 워너 다음으로 인수합병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할리우드는 소수의 초거대 콘텐츠 연합체로 재편하는 도미노가 시작되는 곳이 될 수 있다. 디즈니, 넷플릭스-워너, 또 하나의 연합. 자연히 중견 스튜디오의 설 자리는 좁아진다. ◇ 규제 당국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규제 당국이 우려하는 지점은 독점인가 아닌가다. 단순히 영화 회사 하나가 더 커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 소비의 선택지를 알고리즘이 독점하는 구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넷플릭스는 이미 글로벌 스트리밍 시장에서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여기에 워너의 제작, 배급 IP까지 결합한다면 콘텐츠의 생산, 유통, 소비의 전 과정이 하나의 플랫폼에 종속될 수밖에 없어 창작의 다양성, 지역 콘텐츠의 생존, 극장 산업의 존속이 위태하게 될 수 있다. ◇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 이번 인수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모호하다. 재무적으로는 성공 가능성이 높다. IP 결합과 글로벌 구독자 증가는 수익 확대로 연결될 것이니까. 그러나 문화적으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워너가 넷플릭스의 제작 공정에 완전히 흡수된다면 영화는 점점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시청 데이터를 최적화한 콘텐츠 패키지로 변한다. 이는 할리우드가 자부해 온 영화적 상상력에 결정타를 가할 수 있다. 반대로 전통 스튜디오의 제작 철학이 넷플릭스의 기술을 제어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영화산업의 진화로 이어 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할리우드는 서버와 데이터센터, 알고리즘이 새로운 스튜디오가 된다. 넷플릭스의 공동 최고경영자인 ‘테드 사란도스’는 최근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극장 영화 사업에 뛰어 들지 않은 것은 그 사업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사업이 너무 잘 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워너를 계속 운영하면서 기존처럼 극장에서 영화를 개봉하는 방식을 유지하는 인수자가 될 것”이라면서 “HBO는 완전히 그대로 유지되고, 워너 텔레비전은 계속 해서 TV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일자리도 창출될 것”이라고 밝혔다. 인수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할리우드는 이미 돌아설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좋든 싫든 할리우드의 다음 100년은 스크린이 아닌 선택 알고리즘에 의해 시작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시나리오의 힘을 믿고, 왜 이 이야기가 영화여야 하는가의 분명한 이유가 있고, 마음에 오래 남아 생각나고 말하게 되고 다시 떠올리게 하는 영화를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알고리즘이 백번 추천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영화는 살아남지 못하니까 말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체포하고 새로운 국정 운영 구상을 발표한 후, 세계는 더 이상 ‘일시적 충격’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국제 질서를 떠받치던 규칙과 관행, 금기와 합의가 하나둘씩 무력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의 안보 동맹은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이란에서는 반정부 시위가 확산하며 신정(神政)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향해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미사일을 발사하며 냉전 이후 암묵적으로 지켜진 선을 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관통하는 인식은 분명하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세상은 끝나고 있으며, 이미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국제정치·경제 분야의 전문가 다섯 명에게 “다가오는 세계는 어떤 모습일 것인가”를 물은 뒤 이들의 답변을 종합해 혼돈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다섯 가지 기둥을 세웠다. 여기에 필자의 의견을 덧붙여 탈질서의 세계를 전망해 보고자 한다. ◇ 에너지가 다시 세계 질서의 중심이 되었다 전문가들이 공통으로 지목한 첫 번째 키워드는 ‘에너지’다. 이는 새로운 화두라기보다는 가장 오래된 문제로 귀환하는 것에 가깝다. 산업 혁명 이후 세계 패권은 언제나 지배적인 에너지원을 누가 통제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석탄의 시대에서 석유의 시대로, 그리고 다시 전기와 희소 자원의 시대로 넘어가는 국면마다 국제 질서는 요동쳤다. 현재는 미국과 중국이 에너지 패권을 놓고 대결하는 양상이다. 석탄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산업을 가지고 있는 중국은 과학자 군단과 산업 연구 개발 역량을 총동원하여 세계 최고 수준의 전기차·배터리·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투자와 설치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물론 중국의 에너지 시스템도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 티베트의 태양광 발전소와 신장 지역의 송전선은 제국주의적 이해관계가 얽히는 바람에 지역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의 중국식 에너지 전환은 트럼프의 WWE(World Wrestling Entertainment)식 변증법과 달리 현대적이다. 미국도 바이든 행정부 말까지는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셰일가스 덕분에 석유와 가스 시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나가며 적어도 친환경 에너지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식의 에너지 정책은 기후 변화를 부정하고, 과학을 공격하며, 화석 연료에 집착하는 '스팀펑크적이다. 태양광 패널, 인공지능의 막대한 전력 소모, 배터리로 움직이는 현대 미군 등 21세기의 에너지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에너지 강국 간의 불평등한 경쟁 속에서 어떤 세계 질서가 탄생할까? 산유국들과 중국식 친환경 미래에 동조하는 국가들 사이에 새로운 권력과 영향력의 블록이 형성될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다. 현재로서는 값싼 에너지로 막대한 이익을 얻는 다극화된 혼란, 즉 드론과 중질 원유를 둘러싼 다중 위기가 예상될 뿐이다. ◇고립주의는 더 이상 현실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은 고립주의의 귀환을 상징하는 듯 보였지만, 전문가들의 진단은 냉정하다. 오늘날 어떤 강대국도 완전한 고립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역, 금융, 기술, 데이터, 공급망까지 얽혀 있는 세계 네트워크는 이미 너무 촘촘해졌다. 터프츠 대학교 플레처 스쿨 국제 정치학 교수인 어피 토프트 박사는 "오늘날 세력 구도는 안정적인 세계 질서를 구축하는 데 세 가지 특징으로 인해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현재의 권력 집중은 제2차 세계대전처럼 임박한 위협에 대한 대응이 아니다. 1945년 얄타 협정은 세계적 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해 지친 국가들이 체결한 협정이었다. 현재 형성되고 있는 세력권 구도는 이와 같은 안정화 효과를 제공하지 못하며, 오히려 세계를 정반대의 길로 이끌 수 있다. 두 번째,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은 자유 무역을 지지하며 세계를 전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고자 했던 100년 역사의 미국 외교 정책을 뒤집어 놓은 대통령에 의해 이끌려 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주석을 존경한다함은,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고 유지할 수 있는 독재자를 존경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현재 가지고 있는 힘을 중시하고 군사 중심의 외교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를 자기 입맛대로 해석해 왔다. 셋째, 과거처럼 지리적 요인만으로 세력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트럼프 행정부가 서반구를 장악하려 하고 있지만, 이는 지리적 위치라기보다는 여전히 동맹, 해외 기지, 그리고 세계 금융과 무역의 중심적인 지위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 역시 무역, 금융 인프라, 기술을 통해 광범위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해 왔다. 러시아조차도 에너지, 식량, 무기 수출을 통한 세계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강대국들은 이 연결망을 통해 자신들의 국력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국가가 고립주의를 선택하여 자급자족하려 한다면, 이는 곧 자신들의 국력을 지탱하는 필수적인 국제적 협력 체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강대국들이 직면하게 될 가장 심각한 위협들, 즉 미래의 팬데믹, 기후 변화, 무기화된 인공지능, 사이버 공격, 그리고 초국가적 테러리즘을 결코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핵무장국 간의 갈등을 풀고 핵 확산 억제를 추진하기도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