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개인을 필요로 하고, 개인은 사회를 필요로...
교육은 미숙한 아동을 성인이 가르쳐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교육의 도야성’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교육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헤르바르트(John Friedrich Herbart, 1776-1841)는 “교육학의 기초 개념은 아동의 도야성”라고 하였는데 헤르바르트학파의 시대적 상황에서 이러한 아동관은 적절하였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교육과 아동의 도야성과의 관계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후반이 되어 듀이(John Dewey, 1859-1952)의 생각은 달랐다. “아동은 활동하는 순간 스스로를 개성화한다”고 한 그의 말처럼 아동의 경험 과정의 중요성을 주장하여 헤르바르트 교육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 글의 전제가 된 또 한 사람이 있다. 경험과학으로서 교육학의 정립에 공헌을 한 프랑스의 뒤르켐(Émile Durkheim, 1858-1917)이다. 그는 교육을 사회 속에서 정치나 경제와 같은 형태로 존재하는 사회적 사실로 보았다. 여기서 사회적 사실이란 개인의 밖에 위치하면서 개인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구속하는 집단에 공유된 행동이나 사고 양식을 말한다.
그는 『교육과 사회학』이라는 책에서 “개인은 사회를 필요로 하고 사회는 개인을 필요로 한다. 그러하므로 교육에 의해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작용은 개인을 억압하거나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개인이 진정으로 인간적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이며, “모든 교육제도는 사회제도의 주요 특징을 하나의 요약 형태와 그 축소형태로 재표현”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교육은 교실 안에서만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까지 확장된다. 따라서 사회의 모든 영역은 교육의 장이 된다. 우리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권력, 정치, 경제,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는 아동들에게 학습이 되어 훗날 연쇄된다는 점이다.
부(負)의 유산을 물러준 기성세대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상속된 유산은 고스란히 우리 후손들이 짊어져야 하는 부채가 된다. 앞으로 여러차례 연재할 글에서는 교육의 문제는 무엇이고 교육개혁의 바른 방향은 무엇인지를 우리 교육의 문제 진단과 외국 사례를 참고로 하여 지적하고 제안하고자 한다. 차기 정부에 교육의 문제를 정확하게 알리고 좋은 교육정책(좋은 교육정책이 란 학생과 학부모가 만족하는 교육의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을 추진하는데 필요한 단서를 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심이 흔들리는 관료사회
세상이 시끄럽다. 미국은 대통령선거로 시끄럽고 우리나라는 다른 일로 시끄럽다. 미국과 우리나라는 법치국가이며 민주국가이다. 우리나라 제도의 골격이 미군정기에 만들어졌으니 비슷한 점이 있지만, 각 주(州)의 권한 중 일부를 연방에 위탁하여 외교, 국방, 통화 등을 연방정부가 담당하고 교육 등 사회정책은 주 또는 지자체가 권한을 가진 미국과, 중앙집권제 국가로서 대통령의 권력이 제왕적이라 할 만큼 센 우리나라는 정치나 행정체제에 상이점이 매우 크다. 그런데 두 나라에서 시끄러운 일이 생긴 배경에는 정보네트워크 사회가 만들어 놓은 뛰어난 과학기술 덕분에 과거라면 묻혀 넘어갔을 일들이 국민에게 소상히 알려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보통 비교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외국의 제도를 단선적으로 비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라마다 문화, 가치관, 경제규모, 인종 및 문화 구성, 통계기준과 통계의 신뢰성의 차이 등 많은 부분에 다양성과 상이점이 존재하므로 외국의 자료를 해석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글에서는 가급적이면 비교는 자제하겠지만 비교할 수밖에 없는 부분에 서는 설명을 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면, 현재 우리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문제는 권력자나 정치인들이 국민을 얕잡아보는 ‘국민 경시’에 대한 경고라고 생각한다. 국민의 대표라고 뽑았지만 국민의 이익보다는 정당의 이익이 우선되고,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목소리보다는 자기가 신봉하는 권력자의 한마디를 정치적 좌표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도저히 있어서 는 안 될 행위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권력이란 억압하거나 통제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권존중을 기본 가치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를 조정하고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수단이며, 국민이 권력에 대해 존중을 표시할 때 지배는 정당화된다는 아주 기본적인 가치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잘 알려진 이론이지만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인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지배의 유형을 ‘카리스마형 지배’, ‘전통적 지배’, ‘합리적·합법적 지배’ 세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현대국가의 지배형태인 ‘합리적·합법적 지배’는 “지배가 합리적으로 제정된 일정의 규칙에 의하여 전면적으로 규제”되는 것을 말한다.
과거 국가는 군주 개인의 가정처럼 제왕적 권력을 가진 군주가 내키는 대로 관직을 임명하고 통치하였다.
정치혁명,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군주의 지위는 약화되고 국가의 기능도 복잡 다양해짐에 따라 지배의 형태도 전통적인 지배에서 법에 의해 규제되고 국가의 행정업무는 합법적으로 임명된 관료들에 의해서 체계적이고 위계적으로 실시되게 되었다. 관료가 국왕의 공복에서 국민의 공복으로 바뀐것이다.
그러므로 관료주의는 몰(沒) 주관적, 비인격적인 성격을 가진다. 바꾸어 말하면 권력을 쥔 자와 관료사이에는 인격적으로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신분 변동은 법령에 의하므로 공무원이 되거나 그만두는 것도 법령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누구의 명령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권력의 비대화로 인하여 관료주의의 한계가 나타나고 있다. 관료사회를 지배하는 한시적 관료집단의 존재이다. 최고 권력자와 인격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권력의 이동과 함께 최고 컨트롤타워에 자리 잡고 앉아 지휘봉으로 관료를 좌지우지한다.
권력에 의해 일부 관료사회는 이미 몰 주관적, 비인격적 성격을 잃고 기회주의자로, 복지부동자의 태도로 카멜레온이 되어간다. 정권에 잘 협조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이 힘들게 10년을 걸어가야 어려운 길을 대우받으면서 편안한 길로 2~3년 만에 갈 수 있는데 얼마나 효율적이고 명예스러운 일인가?
19세기 중반에 영국의 아동문학 작가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본명은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 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이름 모를 액체를 마시고 수시로 키가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앨리스와 같이 관료사회는 때에 따라서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그 중에는 본래 공직자의 자세를 늘 가슴에 새기면서 앨리스처럼 본래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대부분의 공직자들은 가슴에 국민을 새기고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만...
교육의 바른 현상인식이 중요
교육을 얘기하면서 왜 국가적 문제, 특히 정치적 문제를 끄집어내는가에 궁금할 것이다. 교육법령을 조금이라도 아는 독자는 우리나라 교육기본법에서 ‘교육은 교육 본래의 목적에 따라 그 기능을 다하도록 운영되어야 하며, 정치적·파당적 또는 개인적 편견을 전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어서는 아니된다’(제 6조)고 하고 있으므로 교육에서는 정치 얘기가 금지 또는 절제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들어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의 중립성을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정치적 의사결정행위이며, 교육관계법을 만들고 교육재정을 분배하고 교육에 관한 국민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모두 정치행위이다. 이러한 정치적 행위는 법에 의하여 정당화되어 있고 민주주의 사회에 서의 의사결정과정이기도 하다. 그건 정치 그 자체가 지배라기보다는 권력, 정책, 지배, 자치 등에 관련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교육의 중립성이란 교육내용에 특정 정치의 영향력이나 개인의 가치가 작용하여 자라나는 아동들의 가치관이 편향되지 않도록 하라는 이념이므로 교육내용에 이러한 편향된 시각이 반영되는 것은 금지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교육을 하는 사람들(교원단체나 대학의 교원 등)은 교육을 그들만의 문제로 생각하며 사회의 다른 영역이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육부에서 행정직 공무원들이 교육정책을 하므로 교육정책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저항감도 가지고 있고, 국민이나 교육현장의 의견보다는 최고 권력자의 의견에 따라 정책이 좌지우지되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으로 정치권에서는 교육부 폐지론 또는 정권이 바뀌어도 교육정책이 휘둘리지 않고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으로 행정위원회 형태의 조직 설립을 제안하기도 한다.
교육부 폐지론 또는 개혁론에 대헤서는 더 신중한 검토와 논의가 필요하므로 논외로 하겠지만, 교육을 교육만의 문제로 단순화하는 것은 복잡다기하고 다양성의 시대환경을 특징으로 하는 지금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억지와 같은 것이다. 교육은 그 자체로 완결되는 시스템에 아니라 다른 시스템과 결합되어야만 완결되는 사회의 서브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이번 호에서는 교육현상 인식에 관하여 한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지난 2014년에 제정된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약칭, 공교육정상화법)이다. 이 법안은 의원이 제안하여 속전속결로 통과하였다. 이 법에서는 학교는 선행교육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고 사교육기관은 선행학습을 유발하는 광고 또는 선전을 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는데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왜 이 법을 만들고자 하였는지, 즉 제정배경을 참고로 하여 정치권과 국가기관의 교육에 대한 현상인식을 알아보기 위함이다. 보통 법안에는 가장
먼저 제안이유가 나오는데 오로지 사교육이 늘어나고 사교육비가 많이 드므로 공교육의 정상화가 되지 않는다고 모든 원인을 사교육 탓으로 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연 사교육 탓일까? 통계청의 가계조사 자료를 보면 교육비가 가계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높은편이지만 지난 10년간 가계지출에서 교육비 증가는 거의 없고 교통비, 공공요금, 통신비 등의 증가가 현저하다. 오히려 공공요금이나 교통비 등 모든 국민이 반드시 이용하여야 하는 비용이 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법안을 심사하기 위한 국회 상임위에서는 왜 가계에서 사교육비 지출이 문제가 되는가, 왜 학부모들은 사교육을 선택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 의원은 한사람도 없고 장관조차도 사교육이 성행하니 공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답변만 되풀이하였다.
학부모들은 공교육을 망치기 위해 사교육을 선택하는지, 학교에서 충분하게 교육을 받을 수 없으므로 부득이 사교육을 선택하는지 등에 대한 검토나 의견이 누구에게서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대하여 외국의 국회 회의록을 종종 연구 자료로 하고 있는 필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본회의에서는 아예 질문이 없었다). 오직 한 의원만 법안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표결에 불참하였다.
교육과 교육행정간의 역할 정립은 공교육정상화의 시작
우리 학부모들은 공교육과 교사를 가장 신뢰한다는 것이 필자의 소신이다. 사교육은 공교육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제도적 한계로 인하여 공교육이 제공할 수 없는 교육적 욕구를 충족해 준다는 점도 있을 것이고, 극소수의 선택제 학교가 있기는 하지만 사교육기관은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유일하게 자신의 의사에 의하여 선택할 수 있으며 자녀의 교육문제를 진솔하게 말하고 들어주는 권위가 배제된 공간이라는 특별함도 있을 것이다. 특히 사교육기관은 학부모의 선택을 받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학부모에게 외면을 받으면 사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들만의 경쟁적 구조안에서 학부모를 유인하기 위하여 부단하게 노력하여 그 결과물이 인정을 받는 교육적 성과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사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고 자녀를 사교육기관에 오래 보낸 적도 없으며, 더구나 사교육 옹호론자도 아니다. 다만 정치와 교육부가 교육에 대하여 바르게 현상인식을 하고 있는지를 지적하기 위하여 사례로 제시한 것일 뿐이다. 교육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환부가 있다면 설령 표가 떨어지더라도 도려내는 것이 후손들에게 부(負)의 유산을 물려주지 않고자 하는 각오이자 용기일것이다.
미국의 교 육개혁은 교 육기관의 설 명책임(accountability)을 강화하여 학력향상을 기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영국의 교육개혁은 노동조합의 영향력 하에 있는 지방교육당국을 약화시키고 학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한 권리를 확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학력향상을 목표로 하였다. 일본의 교육개혁 슬로건도 우리나라의 공교육정상화와 비슷한 의미인 ‘교육재생’인데 우리나라가 공교육정상화법을 제정하여 학교에서 선행학습을 금지하는 것과 는 달리 정치 스스로가 교육의 문제는 정치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학력과 규범의식을 익히는 기회 보장”이 교육재생의 목적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학교에서 선행교육을 하면 안된다고 법으로 강제하는 나라다. 세계 모든 나라가 정치의 자기반성을 토대로 국가브랜드와 소프트 파워의 창조, 학력향상을 위해 나아가는데 사교육 핑계를 대면서 교사들의 열정과 학생들의 열망을 법으로 제한하는 꼴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는데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미래의 주인공인 우리 아이들이 이러한 교육 환경에서 과연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지 의문도 든다.
금년에 타계한 미래학자 토플러(Alvin Toffler, 1928-2016)는 1970년에 출판된 『미래의 충격』(“Future Shock”) 40주년을 맞은 2010년에 발표한 「다음 40년에 일어날 40가지」(40 For The Next 40) 중에서 화이트컬러 노동자는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어디에서도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미래학자들의 예언이 반드시 들어맞았던 것은 아니지만, 토플러의 말은 예언이라기보다는 지금 국내 또는 한정된 국가 간을 지리공간으로 하는 지식기반사회가 서서히 확장되고 있는 진행형을 강조한 것이리라.
며칠 전 언론기사에 교육부가 교사들에게 수학여행 관광버스 기사의 음주확인까지 하라는 공문을 내려 보냈다고 한다. 교사들이 아동들을 위해 무슨 교육을 어떻게 시킬 것인가라는 교육 본연의 임무가 더 본질인데도 교육 외적인 일을 종이 한 장으로 결정하고 시끄러워지면 거두어들이는 것이야말로 교육행정의 민주성 원리에 위배되는 것이며 공교육의 정상화를 방해하는 행위이다.
교육이 아닌 일들은 교육행정과 지역사회, 시민단체 등이 분담하고 교육 외적인 업무와 행사를 지원하도록 하는 교육 거버넌스를 만들어야 한다. 히말라야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등반대의 대장이 되어 대원들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하는 것과 같은 수직적 행정구조는 비권력적인 조건정비를 주 임무로 하는 교육행정의 본질이 아니라는 점도 스스로 자각하여야 한다. 교육행정의 임무는 시대환경의 변화를 충분히 숙지하고 수시로 교육현장에 귀기울이면서 교육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듣고 경험하고 교육현장과 수평적인 파트너가 되어 그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MeCONOMY magazine November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