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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IMF 외환위기 20년’ …한국 경제 위기는 끝인가?


<M이코노미 김선재 기자> 불합리한 경제운영과 대외 건전성 악화로 1997년 말 우리나라의 경제주권이 국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으로 넘어간 지 꼭 20년이 됐다. IMF 관리 체제 하의 한국 경제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뼈를 깎는 체질 변화를 요구받았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했다. 국민들은 일자리를 잃고 길거리에 나앉게 됐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불확실한 상황에도 국민들은 ‘금 모으기 운동’으로 대표되는 국민적 단합을 통해 2001년 8월 IMF로부터 지원받은 195억 달러의 차입금을 모두 상환했다. 국민의 단합된 힘은 ‘IMF 체제 조기 졸업’을 이끌어냈다. ‘IMF 외환위기’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경제는 세계 11위의 대국이 됐다. 외환보유액은 세계에서 9번째로 많다. 그렇다면 우리 경제는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을까? 대외적으로는 건전성이 상당히 개선됐지만, 저성장이 장기화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소득 격차 는 심화됐다. 그에 따른 양극화 문제와 노동시장의 이중성과 미래 먹거리 산업의 발굴 등 대내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도 산적했다.


1997년 11월21일 밤 10시.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정부 1청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대기업 연쇄부도에 따른 대외신뢰도 하락으로 단기 자금 만기연장 등 외화차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금융· 외환시장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IMF에 유동성 조절자금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튼튼하다던 불과 20여일 전 발표가 있은 뒤였다. 당시 정부는 IMF에 200억 달러 이상의 유동성 조절자금을 요청했고, 같은 해 12월3일 IMF는 우리나라에 총 210억 달러의 구제금융 지원을 승인했다. 이와 함께 세계은행(WB)에 서 100억 달러, 아시아개발은행(ADB)이 40억 달러를 지원 하기로 하는 등 350억 달러의 국제기구 지원이 결정됐다.


이후 미국과 일본 등 6개국이 200억 달러를 추가 지원함에 따라 한국은 총 550억 달러의 지원을 받게 됐다. IMF 체제 하 에서 한국 경제는 큰 폭의 금리인상, 구조조정, 공공재의 영리화 등 각종 굴욕적인 조건을 견디면서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리고 약 4년 만에 195억 달러의 차입금을 모두 갚고 IMF 체제에서 졸업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업이 줄도산했다. 1997년 말에는 1만7,000여개 기업이 사라졌고, 조흥은행, 제일은행, 상업은행, 서울은행, 한일은행 등 33개였던 시중은행은 16개로 줄었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이 피해를 입은 것 은 말할 것도 없다.


경상수지 적자·대외채무 급증에 아시아 외환위기 겹쳐


한국의 외환위기가 발발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대기업들의 외형경쟁이 촉발한 과잉·중복투자에 따른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와 대외채무 급증고, 또 다른 하나는 태국의 외환위기로 시작된 아시아 외환위기의 확산이다. 1997년 태국은 심각한 경기불황을 겪고 있었다. 바트화 강세로 수출 의존도가 컸던 태국의 수출 경쟁력은 하락했고, 외화자본 의존도가 높아서 통화정책을 쓰기에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태국은 고정환율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가치가 높은 바트화에 대한 투기세력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지만, 태국 정부는 이런 우려에 무감각했고 실제로 1994년 멕시코 사태 이후 지나친 외자 유치 등이 문제가 됐다. 그럼에도 아무런 조치는 없었다.


결국 1992년 영국 중앙은행에 심각한 환차손을 입혔던 금융투기세력인 헤지펀드가 1996년 바트화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고정 환율제를 취하고 있던 상황에서 태국 정부는 외환보유고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해 투기세력들의 공격을 방어해야 했지만 오히려 외환보유고를 투입해 환율을 방어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459억 달러에 달했던 태국의 외환보유고는 1997 년초 25억 달러 수준으로 급감했다. 태국 정부는 결국 IMF 의 권고를 받아들여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로 이행, 충분한 준비 없이 금융시장을 개방하게 된다. 이후 외환위기는 동남아시아를 넘어 홍콩 등 동아시아 국가를 비롯해 전 세계로 확산된다.





아시아 금융의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는 홍콩이 투기세력으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되자 국제자본들은 동아시아 금융에 대한 신뢰를 거두고 투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홍콩에서 외자 조달비중이 높고 단기외채 비중이 높았던 우리나라는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돼 결국 외환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와 함께 국내 경제도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우리 경제는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와 대외채무 급증으로 대외건전성이 상당히 취약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아 시아 외환위기 발발로 외화자본이 급격하게 유출되자 그로 인한 충격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투기등급으로 분류된 ‘한국’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1년 전인 1996년 우리나라의 경상수지는 238억3,000만 달러 적자로, 1990년부터 1996년까지의 경상수지 누적 적자는 487억 달러에 달했다. 외환위기가 발생했던 1997년 경상수지는 102억8,500만 달러 적자였다. 외환위기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외환보유액은 1997년 말 204억 달러였다. 한국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국내금융기관의 해외점포에 예치된 외자를 제외하면 당시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50억 달러에 불과했다. 외환보유액은 바닥인데 만기가 1년이 안 되는 단기외채의 외환보유액 대비 비중은 286.1%에 달했다. 특히,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단기 외채가 늘었다.




1994년 총외채는 전년대비 29.6% 증가했는데, 장기외채는 7.3% 증가한 반면, 단기외채는 무려 58.3% 급증했다. 또한 총외채에서 금융기관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40% 수준에서 1996년 60%를 상회했다. 이밖에 1997년 12월 코스피 종가는 376.31이었고, 스탠다드앤푸어스(S&P), 피치(Pitch), 무디스(Moody’s) 등 3대 신용평가사는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을 ‘투기등급’으로 분류했다. 우리 경제가 이같은 지경에 이르게 된 원인에 대해 현정택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은 ‘대마불사(大馬不死)’를 꼽았다. ‘대마불사’란 덩치가 큰 회사가 망하게 되면 사회적 파장·부작용이 너무 크기 때문에 구제금융 등을 통해 결국은 살아남는다는 의미다. 경제용어로는 ‘Too big to fail’과 같은 말이다.


현 원장은 지난달 21일 전경련회관에서 한국경제연구원이 주최한 ‘외환위기 극복 20년 특별대담-위기 극복의 주역으 로부터 듣는다’에서 “기본적으로 기업이나 금융의 행태가 정상적이거나 합리적으로 운영되지 않는 관행이 오랫동안 쌓여있었다”면서 “큰 기업들이 은행에서 돈을 빌려 이익이 나면 그것은 내 돈이 되지만, 손해가 나면 (손해에 대한 비용이) 기업 책임이 아니라 사회화되는, ‘이익의 사유화·비용의 사회화’ 경향이 관행이었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덩치를 키우는데 급급했던 정부 입장에서 큰 기업이 쓰러지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 때문에 공적자금을 통해 기업·은행의 손해를 보전해주고, 외형경쟁에 한창이었던 기업들은 은행으로부터 더 큰 돈을 빌려 과잉·중복 투자하는 차입경영이 만연했다는 것이다.


이어 “궁극적으로 돈을 빌려주는 금융기관이 위험 관리나 건전성 관리 등의 체계가 잘 돼 있으면 아무리 기업에서 그런 행태를 보이더라도 돈을 더 지급하거나 빌려주지 않을 텐데 그런 기능이 없었다”며 “결과적으로 기업들의 자기자본대비 부채비율은 300% 내외에서 1997년 400% 수준으로 급등했다”고 설명했다. 부실위험판단의 기준이 자기자본대비 부채비율 200%라는 점을 감안할 때 당시 기업들의 줄도산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30대 그룹 중 19곳, 도산 혹은 그룹 규모 감소


이런 이유로 당시 30대 재벌 그룹 중 현재도 그 자리를 지키 고 있는 그룹은 11곳에 불과하다. 19곳, 63%에 해당하는 재벌 대기업들이 외환위기의 파도에 휩쓸려 문을 닫거나 각 계열사별로 해체돼 순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대우’의 해체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자산이 35조5,000억원으로 현대·삼성·LG 등과 함께 우리나라 재벌그룹 ‘넘버4’였던 대우는 경영난에 시달리다가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해체 수순을 밟았다. 현재는 (주)대우가 대우인터내셔널(현 포스코 대우)과 대우건설로 나뉘었고, 나머지 계열사들은 모두 흩어졌다. 그마저도 대우건설은 현재 매각이 진행 중이고 대우조선해양은 최근 법정관리에서 기사회생했다.




이밖에 쌍용(자산총액 16조5,000억원, 7위)이 쌍용정유(현 에쓰오일)와 쌍용중공업(현 STX중공업)으로 나뉘었다. 이 외에도 동아(10위), 고합(17위), 진로(22위), 동양(23위), 해태(24위), 신호(25위), 뉴코아(27위), 거평(28위), 새한(30위) 등 11개 그룹이 사라졌다. 당시 재계 1위였던 현대그룹은 ‘왕자의 난’ 등 부침을 겪으면서 9개 그룹으로 쪼개졌다. 그 중 현대자동차그룹은 현재 재계 2위에 올랐고, 현대중공업은 9위, 현대백화점은 23위에 자리했다. 5대 그룹으로 쪼개진 LG그룹은 LG(4위)·GS(7 위)·LS그룹(17위)이 30대 그룹에 여전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선택과 집중을 통해 내실을 다져 그룹 성장의 발판으로 삼은 곳도 있다. 외환위기 당시 재계 2위였던 삼성은 경영진단을 통해 주력 사업 분야를 전자·금융·무역 등으로 좁히고 나머지 계열사들은 모두 정리하는 초강수를 뒀다. 이를 통해 51조원이던 삼성의 자산총액은 현재 363조원으로 7배 넘게 늘어났다. LG도 그룹이 쪼개지기는 했지만 디스플레이·전자·화학 등 주력 사업에 집중하는 전략을 통해 4위를 유지하고 있다. 롯데는 20년 전 재계 11위였지만, 현재 는 5위로 올라 가장 큰 폭의 상승을 보였다. 삼성에서 분리된 신세계와 CJ, 포스코, KT, 미래에셋 등 15곳이 새롭게 30대 그룹에 이름을 올렸다.


전 국민에 트라우마로 남은 ‘환란(煥亂)’


당시 우리나라가 겪은 외환위기는 ‘환란(煥亂)’이라고 불릴 정도로 앞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시련이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길거리로 나앉은 국민들은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1996년 2.0%이던 실업률은 1997년 2.6%, 1998년 7.0%로 급상승했고, 실업자 수는 1997년 56만8,000명에서 1998년 149만명으로 3배가량 늘었다. 실직, 경제적 어려움, 갑작스러운 생활고에 대한 충격과 고통으로 인해 수많은 국민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때문에 국민들의 기억 속에도 ‘IMF 외환위기’는 상당한 ‘트라우마’로 남게 됐다. 지난달 14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10월23일부터 26일까 지 전국 만1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외환위기가 국민들의 인식과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7.4%가 한국 경제의 가장 어려운 시기로 ‘IMF 외 환위기’를 지목했다고 밝혔다.


또한 59.7%는 ‘본인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본인·부모·형제 등의 실직 및 부도 경험 39.7%, 경제위기에 따른 심리적 위축 64.4%)’고 응답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달 1일 2018년도 예산안 관련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당시 국민들이 겪었던 고통과 시련에 대해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IMF 외환위기’는 우리 국민 모두에게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큰 충격을 줬다. 경제적 충격만이 아니었다. 심리적·정서적 충격이 국민의 삶 전체를 뒤흔들었다”며 “그 후유증은 국민들의 삶을 바꿔버렸다. 외환위기가 바꿔놓은 사회경제구조는 국민의 삶을 무너뜨렸다”고 말했다. 저성장과 실업이 구조화된 사회 속에서 오로지 개인의 능력과 책임만으로 삶의 기반을 복구하고 개인과 가정을 지켜야하는 상황 속에 내몰린 국민들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 자식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물려주기 위해 일상화된 과로를 사력을 다해 견뎌야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당시에도 직장을 잃고 당장의 생계가 불확실해진 상황에서 국민들은 국가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고 하나로 뭉쳤다. 국제사회의 신뢰를 다시 받을 수 있게 한 계기가 된 ‘금 모으기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1997년 12월부터 시작된 ‘금 모으기 운동’은 다음 해인 1998년 4월까지 5개월간 이어졌고, 정부 추산 227톤의 금이 모였다. 약 22억 달러에 해당하는 양으로, 당시 한국의 외환보유액(1997년 말 기준 204억 달러)의 10%정도 되는 수준이었다. 외환위기 탈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국제적으로 큰 인상을 남겼다. 지난달 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국회 연설에서 “나라가 금융위기에 처했을 때 수백명씩 줄을 지어 가장 값나가는 물건들을 기꺼이 내놓았다. 여러분들의 결혼반지, 가보, 황금 행운의 열쇠를 내놓으며 자녀들의 더 나은 미래들을 담보하고자 했다. 단순한 금전적 가치 그 이상이며 마음과 정신의 업적”이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국민들의 인식도 그랬다. KDI의 설문조사에서 절반 이상의 응답자들은 우리나라가 ‘IMF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금 모으기 운동 등 국민단합(54.4%)’을 꼽았다.


환란 20년 후…경제 체력 올랐지만 성장 동력 후퇴


나라 경제와 국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IMF 외환 위기’ 이후 우리 경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외환위기를 촉발시켰던 대외건전성은 크게 개선돼 경상수지의 경우 올해 1~9 월까지 933억8,000만 달러의 누적 흑자를 기록했다. 2012년 2월 이후 67개월 연속 흑자행진이다. 외환보유액은 올해 10월 기준 3,844억6,000만 달러로 20년 전보다 무려 18.4배 늘어, 세계에서 9번째로 달러화가 많은 나라가 됐다. 또한 1,222억 달러 규모의 양자 혹은 다자간 통화스와프도 체결했다. 최근에는 중국과 56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2020년 10월10일까지 연장하는 것에 합의했 고, 캐나다와는 ‘무기한·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체결하기도 했다. 2014년 9월에는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순대외금융자산국으로 전환했고, 만기 1년 미만 단기외채 비중은 9월 기준 31.1%로, 같은 기간 10분의 1 수준으로 감소하는 등 외채구조도 개선됐다. 주식시장 역시 규모가 커져 지난달 22일 종가는 2,540.51이었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는 한국에 대해 역대 최고수준의 신용 등급을 부여했다. S&P는 ‘AA’로 1997년 대비 11계단 상승했고, 피치는 같은 기간 12계단 오른 ‘AA-’, 무디스는 8계단 상승한 ‘Aa2’ 등급이다. 모두 일본보다 2계단 높은 수준이다. 시간이 지나 경제 규모가 커진 만큼 경제 체력도 상당히 오른 모습이다. 그러나 성장 동력은 상당히 후퇴했다. 저성장의 장기화로 저성장이 고착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대기업·중소기업 및 정규직·비정규직간 소득 격차 확대에 따른 양극화, 1,400조원을 넘은 가계부채 문제 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경제규모는 커졌지만 기업들이 고용을 늘리지 않는 ‘고용 없는 성장’이 계속됨에 따라 취업난 특히, 청년층의 취업난은 심각한 상황에 내몰렸다. 뿐만 아니라 대기업 의존형 경제운영 방식과 정경유착 등의 문제점 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 7.6%, 외환위기가 터진 1997년에도 5.9%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 우리 경제는 1998년 –5.5%의 성장률을 기록한 이후 좀처럼 과거와 같은 높은 성장률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최근 5년간의 경제성장률 역시 2012년 2.3%, 2013년 2.9%, 2014년 3.3%, 2015년 2.8%, 2016년 2.8%를 기록하는 등 2014년을 제외하고는 2%대 성장에 그쳤다. 올해는 2015년 이후 3년 만에 3%대 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 지만, 2018년 경제성장률은 다시 2%대로 전망되는 등 2%대 성장이 고착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계속되고 있다. 잠재 성장률 저하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 중 하나다.


2000년대 진입하면서 점점 하락


199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7%대의 높은 잠재성장률을 보였지만, 2000년대에 진입하면서 점차 하락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1~2005년 4.8~5.2%였던 연평균 잠재성장률은 2016~2020년 2.8~2.9%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는 저조한 노동생산성과 저출산·고령화 등이 원인으로 작용한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광공업 노동생산성지수(2010년=100)는 2008년 88.5에서 2016년 96.5로 9년 동안 9.0p 개선되는데 그쳤다. 또한 한경연에 따르면 노동생산성이 1997년 15.6달러에서 2015년 31.8달러로 2배 이상 늘어 같은 기간 OECD 회원국 중 31위에서 28위로 상승했다. 하지만 아직 OECD 평균의 68%에 불과한 수준이었고, 증가율도 1997년 6.3% 이후 꾸준하게 둔화하는 모습이다.




출생아 수는 올해 40만명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보이고,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올해를 정점으로 내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할 전망이다.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14.02%(고령사회)다. 산업연구원은 “생산가능인구가 0.1%p 감소할 때마다 GDP가 0.30% 감소한다”며 “이는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저하시킨다”고 경고했다. 취업난도 문제다. 특히, 청년층의 취업난이 심각한 수준이다. 10월 청년 실업률은 8.6%로, 10월 기준으로 1999년 이후 가장 높았다. 청년 체감실업률(고용보조지표3)은 21.7%를 기록해 청년 5명 중 1명이 사실상 실업상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이로 인한 소득 격차 확대에 따른 양극화 심화다. KDI의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복수응답)들은 외환위기가 ‘일자리 문제 및 소득격차’ 등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사회적 문제를 심화시켰고,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비정규직 문 제(88.8%)’라고 판단했다. 다음으로는 ‘소득·빈부격차 확대 등 양극화(31.8%)’였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6년 전체 근로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3.2%였던 비정규직은 1997년 45.7%, 1998년 46.9%, 1999년 51.6%, 2000년 52.1% 등 꾸준하게 증가했다. 이후 40%대를 유지하던 비정규직 비율은 최근 하향세를 보이며 8월 기준 32.9%까지 줄어들었다. 그러나 주요 선진국들과 비교했을 때는 여전히 높은 수준이고, 정규직과의 임금 격차 역시 벌어지고 있다.


소득 격차에 따른 양극화 문제도 심각하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20세 이상 인구 중 최상위 10% 소득집단의 소득비중은 1999년 전체의 32.9% 에서 2015년 48.5%로 늘어났다. 홍민기 연구위원은 “낮은 고용률과 장시간 노동이라는 구조적인 문제, 세계화와 같은 시장조선, 노동유연화와 같은 정책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면서 외환위기 이후 소득 불평등이 극심해졌다”고 설명했다. 관련해서 한국을 찾은 IMF 연례협의 미션단은 지난달 14일 한국경제전망 보고서에서 “구조적 문제는 견조하고 지속가능한 장기성장으로의 복귀를 저해한다”며 “이는 장기적으로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부정적인 인구구조 및 생산성 증가 둔화, 불충분한 사회안전망, 노동시장 및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이중구조가 불평등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노동생산성이 여전히 미국의 50% 정도 수준에 머 무르는 상황에서 고용증대와 생산성 향상이 정책의 우선순위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2의 위기’ 올까?…문제는 ‘실천’


이처럼 대외건전성은 개선됐지만 우리 경제는 이제 대내 건전성이 많이 취약해진 모습으로 변화했다. 즉, 과거의 위기는 외부의 충격 때문에 발생했지만 앞으로 발생할지 모를 위기는 우리 안에서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세계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산업·기술간 융·복합을 통한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에 몰두하고 있다. 지금으로선 이 변화의 흐름에 잘 적응하고 참여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슈에 논의와 대립에만 매몰되지 말고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는 한편, 행동으로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외환위기 극복 20년 특별대담-위기 극복의 주역으로부터 듣는다’에서 “지금은 ICT(정보통신기술) 융합이니 4차 산업혁명이니 하는 등 신기술을 개발하는 시기”라며 “경제가 어려워졌을 경우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복원력과 신축성을 가질 수 있도록 구조적 해결을 하는 것이 큰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우리가 경제발전과 민주화 추진 과정에서 자율성과 권익, 다양성이 확대됐는데, 이것이 자기 권익 주장, 이익 확대에만 신경써서 대립과 갈등, 투쟁 속으로 가게 된다면 문제”라면서 “자기 권익과 이익이 사회와 회사가 잘 살면서 개인의 생활도 보장받는 쪽으로 가고, 기업가는 사명을 제대로 실천하면서 사회적인 비용이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경제운영도 진실에 입각해서 해나간다면 우리가 결코 냄비 속 개구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국이 한 단계 성장을 위해서는 국민모두가 올바른 방향으로 합의하고 회귀할 수 있는 복원력확보를 위한 유연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사회적 합의와 문제해결을 위한 실천도 요구된다. 또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완화할 수 있는 구조개혁과 소득 불균형에 대응하는 포용적 성장지원 정책이 뒷받침 돼야 할 것 으로 보인다.

MeCONOMY magazine Decembe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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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멍쉬멍, 놀며 쉬며 배우는 농촌 크리에이투어 20개소 선정
농림축산식품부는 한국농어촌공사(사장 이병호)와 함께 「2024년 농촌 크리에이투어 지원사업」 대상 시․군 20개소를 선정, 발표했다. ‘농촌 크리에이투어(CREATOUR)’는 농촌에 특화된 테마 관광상품으로 농촌관광 경영체가 민간 여행사와 협업하여 올해 처음으로 개발ㆍ운영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은 농촌을 단순히 문화체험하는 곳만이 아니라 방문하면서 배우고 휴식하면서 재미를 느끼며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한 새로운 프로그램이다. 농식품부는 이번 공모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한 38개 시․군을 대상으로 서면ㆍ발표심사를 거쳐 최종 20개소*를 선정하였다. 선정된 지역은 농촌특화 테마 상품의 개발ㆍ운영 및 홍보 등에 소요되는 사업비 250백만원(국비 125백만원)을 지원받게 될 예정이다. 이번에 선정된 대표적인 곳은 강원 원주시의 「사색(思索) 크리에이투어」, 충남 홍성군의 「따르릉 유기‘논’길」, 전북 익산시의 「다이로움 시골여행」, 경남 거창군의 「신비한 웰니스 거창」 등이다. 김종구 농식품부 농촌정책국장은 “농촌 크리에이투어 사업을 통해 도시민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농촌관광 기회 제공이 되기를 기대하며, 국민 모두가 잘 쉬고, 즐길 수 있는 농촌여행을 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