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산업기술에서 가장 큰 문제는 대학과 산업계가 거의 연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학과 국가출연 연구기관에서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으나 산업계가 이를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 그만한 사정도 있었다. 우리 기업들이 쓰는 기술들이 100% 미국과 영국, 일본, 독일에서 장비와 공정을 그대로 가져다 써왔다. 이러다 보니 소재와 중간재의 공급망도 자연히 연계됐기 때문에 국내 학계와 연구기관들의 연구개발 역량이 높아져도 굳이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학자가 연구(Research)에서 개발(Development)로 넘어가려면 산업계의 수요와 투자가 뒤따라야 한다. 국제학술지에 연구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학자로서는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이들이 개발에 노력을 쏟으려면 그만한 인센티브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게 크게 부족했다. 정부가 막대한 과학기술 자금을 살포해도 별로 경제적 산출 효과가 없었던 것도 이런 이유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가끔 실험실에서 성과를 거둔 것들을 가지고 연구자 자신이 갖고 나와 벤처기업을 창업하기도 하도, 기존 중소기업들이 괄목할 만한 연구개발 결과에 주목해 도입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개발된 것들 중에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기존 공급선을 교체할 만한 동인을 제공하는 경우는 많지 않을 터이다.
우리 정부가 과학기술정책 리더십을 오랫동안 상실한 채 표류한 것도 큰 원인 중의 하나다.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 이병철, 최종현, 박태준, 오명 같은 기라성 같은 과학기술의 리더가 빛바랜 사진첩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아마도 1980년대 CDMA개발이 마지막 국책 개발 성공사례였던 것 같다. 국가 과학기술의 미래 비전을 설정하고 거기에 산업계와 학계의 역량, 그리고 정부의 지원을 집중하는 리더십이 부재했다.
이번 일본의 수출규제는 잠자던 과학기술계에 일대 각성을 일으킨 경종이었다. 경제정책에 관한 한 뜨악하기만 한 문재인 정부도 수출규제에 대해 신속하고 단호하게 소재 국산화에 예산을 전폭 지원할 모양새다.
신임 최기영 과기정통부 장관은 기초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그건 당연한 것이고 기초 연구의 결과를 개발로 유인하고 기업들이 개발된 것들을 산업화하는 동기를 가지도록 이끄는 리더십이 훨씬 중요하다. 학자 출신들이 입만 열만 ‘기초연구’를 되풀이하는데 좋은 말도 반복하면 연구비 증액만을 원한다는 오해를 사기 쉽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상업화되지 않는 연구개발은 인류의 과학발전에는 기여할지 모르나 한국경제에는 먼 얘기다.
‘기초연구’ 해야 상업화 가능성 높은 기술들이 많이 산출될 수 있음은 불문가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연구가 개발에 연결되지 않고 상업화되지 않고 사장되는 게 더 큰 문제라는 게 기자의 생각이다. 실무 경험도 겸비한 최기영 장관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강한 리더십을 기대한다.
국가 산업기술의 리더십은 학자들의 보편적 연구와 기업들의 시장성 있는 산업적 욕구를 조율하면서 미래의 산업기술 비전을 향하여 인력과 자금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결코 기초연구만 강조하여 연구 논문만 먼지 앉은 채 쌓아둔다든지, 오로지 당장의 상업적 수요에 부응하는 기술만 개발한다든지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미래 비전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쟁국들이 세계 도처에 존재하고 있으며 특히 일본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을 통상무기로 사용한 마당에 안이한 대처로서는 미흡하다. 우리에게는 현재의 기술력도 일본에 비해 떨어지고 일본의 전통적 강점인 정부 주도 아래 긴밀한 산학 협력 정신이란 면에서 약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화급하다. 삼성전자가 확보한 부품 재고가 1년 치도 확보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혀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함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장인의 노하우에 기반한 모노츠쿠리 기술력이다. 이들의 방식을 따라가면 항상 한 발 늦을 가능성이 높다. 바야흐로 4차혁명기술이 휘몰아치고 있다. 우리의 소재와 부품, 장비의 국산화는 4차혁명 기술을 통합하는 위치에 있는 AI기술로 새롭게 구축할 것을 제안한다. 과학과 공학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큰 AI기술은 장인의 노하우까지도 최대한 알고리즘으로 대체하는 와해적 기술이다.
기존의 장인 기술과 노하우를 불필요하게 만든다는 게 AI개념이다. AI시대에도 여전히 인간이 할 수 있는 기술과 노하우가 분명 존재하나 그 모습은 지금까지의 형태는 아닐 것이다. AI기술 아래서는 새로운 기술자와 장인, 노동자들이 나타나야만 한다. 어찌 보면 4차혁명 기술은 우리보다 앞선 선진국과 똑같은 출발선에 뛰게 하는 점이라고 볼 때 우리에겐 호기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이 그런 자세로 뛰며 AI혁명만큼은 미국을 앞서겠다고 호언하고 있다.
일본 과학기술계도 AI기술 적용에 적극적이지만 이미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소재와 부품과 장비 분야의 장인들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백지 상태에서 AI기술을 도입하기는 쉽지 않으리라고 본다. 우리는 기존 기술력에서 가벼운 만큼 새로운 접근을 통해 전혀 다른 방식을 택해보자는 것이다.
우리 경제를 회고해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자는 국민의 일치된 ‘동기’가 결정적으로 작용해 성공했다고 본다. 일본의 수출규제는 오랜만에 ‘기술 자립화’에 대한 전 국민적 동기를 부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학계가 산업계를 도우겠다고 스스로 나선 점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 사태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에 처한 한국산업을 되살리는 변곡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끝으로 국가경제는 언제나 인간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주의자들에 의해 망가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 이태리, 그리스, 스페인의 정책 실패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일본 아베 정부의 수출규제가 이상적 환상에 젖은 문재인 정부를 깨우치게 해 강력한 기술 리더십을 발휘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